윤고은 장편소설 '도서관 런웨이'
현재 결혼생활을 하고 있지 않은 성인이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가입하도록 해주는 보험이 있다. 20년 후 계약 만기까지 계속 비혼으로 남아 있으면 원금 130% 환급 보장해주고, 결혼예물부터 결혼 생활을 둘러싼 여러 문제에 대한 소소한 보장도 약속한다. 정말 결혼도 보험이 된다고?
윤고은 작가는 그렇다고 시치미를 뚝 뗀다. 아니, 한술 더 뜬다. 1999년엔 왕따보험이 다수 등장했고 2000년에는 반려견과 수족관 물고기가 보험의 영역에 포함됐단다. AS손해보험사가 AS안심결혼보험을 출시한 건 2012년인데 6년 뒤 회사 파산과 함께 판매가 중단됐다는 설명도 덧붙인다. 신작 장편소설 '도서관 런웨이'에서다.
'도서관 런웨이'는 최근 장편 '밤의 여행자들'로 동양인 최초로 영국 대거상 번역추리소설상을 받은 윤 작가가 지난해 현대문학 11월호에 발표한 소설을 새로 고쳐 쓴 작품이다. 제목만 봐선 도서관 사서의 모델 도전기 같지만 그와는 전혀 상관없는, 실종에 관한 추리 소설이자 잔열로 충만한 로맨스 소설이며 엉뚱한 상상력으로 가득한 블랙 코미디다.
1인칭 화자 '나'는 글로벌 보험사에서 10년째 근무 중인 30대 후반의 여성 유리다. 그는 한때 같은 집에서 살았을 만큼 가까웠지만 지금은 소원해진 친구 안나와 오랜만에 조우한다. 안나는 도서관 덕후여서 여행 다니는 곳마다 도서관부터 방문하고 소셜미디어도 온통 도서관을 런웨이처럼 누빈 사진으로 채우는 인물. 남편도 도서관에서 처음 만났고, 프러포즈 또한 도서관에서 받았다.
코로나19로 문을 닫았다가 오랜만에 문을 연 동네 도서관에서 안나는 신기한 책 한 권을 발견한다. 표지엔 ‘지속 가능한 결혼생활을 위한 지침서’라고만 쓰여 있어 에세이로 종종 오해받는 AS안심결혼보험약관집이다. 조그맣고 빽빽한 글씨로 가득한 일반 보험약관집이 아니다. 에세이나 소설 같은 서사구조를 갖춘 683쪽짜리 호화 양장본. 인스타그램에 올렸더니 100만 원에 책을 사겠다는 사람까지 나타났단다.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를 들은 지 3주쯤 지나 유리는 안나의 지인 미정에게 안나가 며칠째 연락 두절이라는 연락을 받는다. 유리는 책의 정체와 안나의 실종 사이에 연관이 있을 거라 믿고 추적에 나선다. 우선 중고거래 플랫폼에 보험약관집을 구한다는 글부터 올린다. 그러자 과거 AS보험회사직원이었던 조가 등장하고, 그와 만나면서 유리는 조금씩 마음이 움직이는 걸 느낀다.
미스터리를 추적해가는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소설은 안나의 실종에 별 관심이 없다는 듯 보험약관집에 초점을 맞춘다. 유리도 안나가 미정과 함께 참여했다는 독서모임에 잠깐 들르는 정도 외엔 '탐정 활동'을 거의 하지 않는다.
역시 하이라이트는 보험약관집인데 작가의 블랙 유머가 분수처럼 솟아오른다. 보험에 가입하면 준다는 ‘논팽이(Non-팽이)’라는 이름의 로봇 청소기 이야기부터 황당하다. 논팽이는 일반 청소 기능뿐만 아니라 블랙박스처럼 말을 주워 담는 기능도 있다. 부부 간 폭언, 명예훼손의 증거 자료로 쓰일 수 있다는 얘기다. 보험에는 육류와 아보카도처럼 탄소배출량이 많은 음식을 소비하지 않는 등 환경에 도움을 줬다는 걸 증명할 경우 환급금을 주는 기후 공감 특약도 있다.
코로나19로 모르는 사람과 대화하는 것조차 위험해진 시대, 보험 같은 자본주의적 안전장치 없이는 사랑도, 결혼도 주저하는 세태에 대한 풍자일까. 보험약관집에 등장하는 K의 아버지는 결혼을 상자에 비유하며 과거에 비해 상자의 크기가 작아졌다고 말한다. "결혼이라는 상자 안에 담을 수 있는 것들이 작아져 진짜 중요한 것들만 담을 수 있게" 됐다며 말이다.
한참 보험 얘기로 엉뚱한 상상력을 풀어놓던 작가는 다시 정색하고 안나의 숨겨진 비밀을 한 꺼풀씩 풀어놓는다. 거침없이 사랑에 뛰어들고, 사랑 이후의 사랑까지 품는 사람인 안나를 소설의 양 끝에 배치한 건 '이 책은 사랑이야기'라는 선언과도 같다.
'도서관 런웨이'는 스토리텔링의 힘을 예찬하는 소설이기도 하다. 안나가 프러포즈를 받았던 곳은 한때 박물관이었으나 스토리텔링이 담긴 책들과 함께 도서관으로 다시 태어났던 것. 대개 쓰레기통으로 직행하는 보험약관집을 일약 소설의 주인공으로 만든 것도 앙상한 약관집에 두꺼운 살을 입힌 스토리텔링의 공이다. 이미 멈춰버린 안나의 사랑을 계속 이어갈 수 있게 해주는 것 역시 스토리텔링이다. 어쩌면 작가는 사랑 이야기를 하는 척하며 이야기에 대한 자신의 짝사랑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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