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후보들의 '1호 공약'으로 살펴본 시대정신
정치개혁→경제성장→경제민주화·복지→일자리
내년 대선 앞두고 공정성장, 신복지, 부동산이 화두
"국민이 반대한다면 (한반도 대운하를) 추진하지 않겠다."
2008년 6월 19일 이명박 전 대통령은 특별기자회견에서, 한반도 대운하 공약 백지화를 선언했습니다. 한반도 대운하는 MB의 '747'(7% 성장, 10년 후 국민소득 4만 달러 시대, 세계 7대 강국) 비전을 뒷받침할 핵심 공약이었는데요.
국민 다수가 반대하고, 한나라당 내부에서도 반발 여론이 빗발치자 일단 한발 물러섰던 겁니다. 하지만 완전한 포기는 아녔죠. 호시탐탐 한반도 대운하의 부활을 노리더니 결국 4대강 사업으로 우회 추진하기에 이릅니다.
공약을 관철시키겠다는 의지를 넘어선 집착, 이쯤 되면 과연 누구를 위한 공약이었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겠죠.
대통령은 5년 만 하고 물러나면 그만이지만, 공약은 영원히 남습니다. 대통령을 지지했든 아니든, 공약이 좋든, 싫든 내 삶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치니까요. 제대로 된 재원 계획이나 타당성 검증 없이 일단 지르고 보는 공약을 수습하는 데 들어가는 건 결국 국민 세금이죠. 그래서 후보만큼이나 더욱 꼼꼼하게 묻고 따져 봐야하는 게 공약입니다.
당장 내년 3월 치러질 대선을 앞두고 각 당의 대선주자들은 앞다퉈 장밋빛 공약을 내놓고 있습니다. 특히 1호 공약은 상징성이 강한데요, 대한민국에서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시대적 과제를 담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정리해봤습니다. 5년마다 무수히 쏟아진 1호 공약의 리스트를.
공정성장, 신복지, 부동산... 2021 시대정신은
이번 대선부터 살펴보죠. 1호 공약으로 짐작해 본 2021의 시대정신은 한 단계 진화된 새로운 성장과 복지, 그리고 부동산. 이렇게 크게 압축해볼 수 있겠는데요.
먼저 더불어민주당 대선 예비후보 이재명 경기지사는 "전환적 공정성장"이란 화두를 들고 나왔네요. 이 지사의 설명을 들어볼까요. "투자할 곳이 많아 투자에 집중하면 경제가 선순환하던 고성장 시대에는 공정보다 성장이 중요했다. 그러나 투자할 돈이 남아돌고 불공정과 불평등이 저성장의 주요 원인이 된 지금은 공정이 성장을 담보하고 성장은 다시 공정의 토대가 된다."
공정을 토대로 한 성장 전략이란 얘기네요. 이 지사의 정책 트레이드 마크인 기본소득, 기본주택, 기본금융 등 '기본 시리즈' 역시 공정을 통한 성장의 장치 중 하나가 될 수 있단 입장입니다.
이낙연 전 대표는 "신복지"를 1호 공약으로 내세웠는데요. 그간의 복지 정책이 단지 최저한의 생활만을 보장했다면, 신복지는 "소득, 주거, 노동, 교육, 의료, 돌봄, 문화, 환경 등 다양한 분야에서 누구나 인간으로서 최저한의 삶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국가가 책임지겠다"는 개념이라고 합니다.
이 전 대표는 이 같은 최저기준을 달성한 다음 목표로 2030년까지 모든 국민에게 중산층 수준의 적정기준의 복지를 제공하겠다는 포부도 밝혔죠.
국민의힘 대권주자인 윤석열 전 검찰총장은 "국민의 집 걱정을 없애드리겠다"며 부동산 문제를 1호 공약으로 치고 나왔습니다. 수도권에 130만 가구를 포함해 5년 간 250만 가구의 주택을 공급하겠다는 청사진을 내놨죠. ▲'청년 원가주택' 30만 가구 ▲'역세권 첫 집 주택' 20만 가구 공약이 눈길을 끄는데요.
신수도권 육성, 지대개혁 등 1호 공약에 이름 올려
대한민국에서 부동산 문제는 워낙 뜨겁다 보니, 발표하자마자 민주당은 물론 국민의힘 대선주자들로부터 집중 견제를 받고 있죠. 당장 유승민 전 의원은 "엄청난 국가 재정이 필요한 비현실적 공약, 허황된 포퓰리즘"이라고 날을 세웠고, 홍준표 의원도 "좌파보다 더한 원가주택 운운은 기가 막히는 헛된 공약(空約)"이라고 직격탄을 날렸네요.
추미애 전 법무장관도 부동산 대책을 1호 공약으로 내세웠습니다. 보다 근본 처방인데요, 부동산 불로소득에 대한 과세를 강화해 늘어난 세수를 무상 복지에 쓰는 "지대개혁"입니다. 경제정책 패키지를 1호 공약으로 준비 중인 유승민 전 의원도 공정소득, 국민연금 개혁에 더해 수도권에 안정적인 부동산 공급 정책도 함께 발표할 예정이라고 하네요.
국가균형발전을 1호 공약으로 내건 주자들도 있습니다. 정세균 전 총리는 '신수도권 육성'을, 김두관 의원은 과감한 자치분권 및 급진적 균형 발전을 주창하며 서울공화국을 타파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나섰죠.
이 밖에도 홍준표 의원은 행정조직 선진화를 표방하며, 정부와 공공기관 통폐합, 원희룡 전 제주지사는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는 소상공인·자영업자를 집중 지원하는 '100조 원 규모의 담대한 회복 프로젝트'를, 박용진 민주당 의원은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와 한국투자공사를 통합한 대한민국 국부펀드 설립'을 1호 공약으로 내세웠네요. '규제 모라토리엄'을 내세운 최재형 전 감사원장은 '필수 규제를 제외한 모든 규제를 원점 재검토'를 1호 공약으로 제시했습니다.
16대 대선 화두는 정치 개혁
20여 년 전 16대 대선 화두는 '새로운 정치'에 대한 열망이었습니다. 노무현 당시 민주당 후보와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는 나란히 정치 개혁을 1호 공약으로 내걸었죠.
먼저 정치권 세대교체를 화두로 제시한 노무현 전 대통령은 4대 비전의 첫 번째로 '바로 선 대한민국'을 제시했는데요. '통합과 원칙의 바른 정치'를 시작으로 20대 개혁 과제 중 상위 5개가 정치에 관한 내용(①특권과 차별의 시정 ②부정부패의 척결 ③좋은 정부의 구현 ④자율과 분권의 지방화 시대)일 정도로 정치개혁에 대한 의지가 강했습니다. 노 전 대통령은 이 같은 공약을 통해 구시대의 낡은 정치를 혁파하고 갈등과 저효율의 정치를 극복하겠다는 포부를 밝혔죠.
정권교체를 내걸었던 이회창 후보는 김대중 정부를 부패정권으로 규정하며,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깨끗한 정부를 만들고, 정치보복과 지역감정 없는 대화합의 시대를 열겠다는 공약을 10대 국가 개혁과제 맨 윗자리에 올려놓았습니다.
17대 대선 키워드는 경제 살리기
2007년 17대 대선의 핵심 키워드는 경제살리기였습니다.
경제대통령을 표방했던 이명박 전 대통령의 공약집 맨 앞머리를 장식한 타이틀은 "잘사는 국민"이었습니다. 747 공약, 300만 개 일자리 창출 등 경제살리기 공약이 목차를 채웠습니다.
정동영 당시 대통합민주신당 후보의 1호 공약도 '차별 없는 성장, 좋은 일자리' 등 경제 분야였습니다. 특히 정 후보는 통일부 장관 경험을 살려 '평화경제론'을 들고 나왔는데요. 민주당의 햇볕정책을 한반도 평화 경제로 계승 발전시킨 개념으로, 대북정책이 일방적인 퍼주기라는 보수진영에 맞서는 논리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문국현 창조한국당 후보는 500만 개 일자리 창출을, 권영길 민주노동당 후보는 청년실업과 비정규직 없는 나라 등을 내세웠을 만큼 2007년 대선은 경제가 지배하는 선거였습니다.
18대 대선 시대정신은 경제민주화, 복지국가, 일자리
2012년 18대 대선에서도 1호 공약은 데칼코마니처럼 겹쳤습니다.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 공히 경제민주화와 일자리, 복지국가에 방점을 찍었는데요. 우선순위만 달랐을 뿐입니다.
먼저 박근혜 전 대통령은 국민행복을 위한 3대 과제로 ①경제민주화 실현 ②일자리 창출 ③생애주기별 맞춤형 복지제도를 강조한 한국형 복지 확립을 제시했죠. 경제적 약자를 위한 경제민주화는 시대적 과제라고 힘을 주면서 말이죠.
"사람이 먼저다"를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운 문재인 당시 민주당 후보의 공약집 말머리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①일자리 혁명 ②따듯한 복지국가 ③경제민주화 ④정치 혁신 등이 자리를 잡았네요. "일자리는 희망" "복지는 투자" "상생의 경제민주화는 시대정신"이라고 힘주어 강조한 게 눈에 띕니다.
19대 대선 1호 공약은 전술핵부터 육아휴직까지 다양
5년 전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이후 치러진 19대 대선에선 후보들의 1호 공약이 꽤 다양했는데요.
먼저 국가안보를 강조한 후보들이 있었죠. 강한 안보를 내세운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는 전술핵무기 재배치를 들고나왔고,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도 자강안보란 개념을 새로 제시했네요.
바른정당의 유승민 후보는 저출산 문제에 집중했습니다. 아이 키우고 싶은 나라를 만들겠다는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민간기업 근로자도 육아휴직 최장 3년 법제화를 1호 공약으로 들고나왔네요.
심상정 정의당 후보의 공약은 촛불혁명 완수하는 국민주권형 정치개혁이었습니다. 국민소환제, 국민발안제, 국민투표 대상 확대 등 직접민주주의 확대를 내세웠죠.
대선 재수생인 문재인 대통령의 1호 공약은 '일자리'였습니다. 2012년에도 강조했던 분야인데요, 공공부문 중심으로 일자리 81만 개 창출과 최저임금 1만 원 인상 등이 이행 방법에 나와 있네요. 문 대통령은 취임 이후 청와대 집무실에 일자리 상황판을 만들고 일자리 창출 현황을 직접 점검하며 공약 이행에 의지를 다지는 모습도 보여줬죠.
잠깐 제목만 살펴도 '혹' 하는 공약들이 참 많죠? 그러나 이렇게 말 한마디로 뚝딱 대한민국의 난제들이 모두 해결될 순 없는 노릇이죠. 과거 대선주자들이 쏟아낸 1호 공약들은 국민들의 눈도장을 찍기에는 충분했지만, 실제 우리의 삶을 얼마나 변화시켰는지를 두고는 평가가 엇갈리죠.
그래서 공약은 어쩌면 대한민국 모두에게 희망고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번에도 잘 안 될 것 같고 어려워 보이지만, 그래도 또 믿고 싶은. 그 잔인한 희망고문을 이번 대선주자들은 끝낼 수 있을까요. 그러려면 당장 흥행만을 위해 급조한, 입에 발린 섣부른 공약(空約)은 버리는 게 우선이겠죠. 공약은 요술봉처럼 뚝딱 이뤄지는 판타지가 아니란 걸, 이제는 국민이 제일 잘 아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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