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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모없고 무의미한 일자리는 왜 계속 늘어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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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모없고 무의미한 일자리는 왜 계속 늘어날까

입력
2021.09.02 18:00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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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가 시위 이끈 데이비드 그레이버 '불쉿 잡' 번역 출간

데이비드 그레이버 영국 런던정경대 교수는 '불쉿 잡'에서 '형식적 서류 작성 직원' 등 불쉿 잡이라고 부를 만한 쓸모없는 직업이 계속 증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게티이미지뱅크

데이비드 그레이버 영국 런던정경대 교수는 '불쉿 잡'에서 '형식적 서류 작성 직원' 등 불쉿 잡이라고 부를 만한 쓸모없는 직업이 계속 증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게티이미지뱅크

2013년 8월 영국 진보 매체 '스트라이크' 인터넷판에 실린 기고문이 화제가 됐다. "우리가 99%”라는 구호를 만들어 2011년 월가 점령 시위를 이끌었던 미국인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가 쓴 '불쉿 직업이라는 현상에 관하여(On the Phenomenon of Bullshit Jobs)'다. 욕설로밖에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쓸모없는 직업이 널려 있다는 이 글에 매체 홈페이지 서버가 마비됐을 정도로 조회수가 몰렸고, 한국어를 포함한 각국 언어로 번역돼 전 세계에 알려졌다.

데이비드 그레이버 영국 런던정경대(LSE) 교수가 별세 2년 전인 2018년에 출간한 '불쉿 잡'은 바로 이 칼럼을 발전시킨 책이다. 업무 자동화 추세로 생산 직업은 줄고 행정 부문만 팽창했다며 화이트칼라 직업을 저격한 그의 글에 공감의 피드백이 쏟아졌다. 뜨거운 반응에 여론조사 업체가 '당신 직업은 세상에 의미 있는 기여를 하는가'와 같은 질문을 던졌고, 그레이버 교수는 이 같은 설문 통계와 독자의 직접 반응을 모아 불쉿 직업의 본격적 이론화에 나섰다.

저자가 생각하는 불쉿 직업, 즉 쓸모없는 직업이란 "유급 고용직으로 그 업무가 철저하게 무의미하고 불필요하고 해로워서 그 직업의 종사자조차도 그것이 존재해야 할 정당한 이유를 찾지 못하는 직업 형태"다. "종사자는 그런 직업이 아닌 척해야 한다는 의무를 느낀다"고도 했다.

'불쉿 잡'에서 텔레마케터는 '깡패'라는 유형의 '불쉿 직업'으로 분류된다. 고객이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사도록 설득한다는 점에서 공격성을 지녔다고 봤기 때문이다. 게티이미지뱅크

'불쉿 잡'에서 텔레마케터는 '깡패'라는 유형의 '불쉿 직업'으로 분류된다. 고객이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사도록 설득한다는 점에서 공격성을 지녔다고 봤기 때문이다. 게티이미지뱅크

쓸모없는 직업의 5가지 유형화도 시도한다. 각각 △제복 입은 하인 △깡패 △임시 땜질꾼 △형식적 서류 작성 직원 △작업반장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제복 입은 하인은 누군가를 중요하게 보이게 하는 게 유일한 목적인 직업이다. 아파트나 빌딩 입구를 지키는 도어맨이나 프런트 데스크 직원을 예로 들었다. 로비스트, 홍보 전문가, 텔레마케터, 기업 변호사 등의 직업은 상대를 구슬리고 압박하는 공격적 요소가 있다 해서 깡패에 비유했다. 임시 땜질꾼은 강력 접착 테이프로 균열을 땜질하듯 조직에 생긴 오류를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이다. 형식적 서류 작성 직원은 실제 목표를 이루는 것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서류를 양산한다. 저자는 이들에 대해 "어떤 단체에서 하지 않는 일을 하고 있다고 주장할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고용된 직원"이라고 꼬집었다. 그리고 이런 업무를 만들어 배분하는 중간 관리자가 바로 작업반장이다.

저자가 내린 불쉿 직업의 정의는 상당히 주관적이다. 저자는 논쟁의 여지가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종사자의 시점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노동자 스스로 노동의 의미를 성찰하기를 바라는 취지로 읽힌다. 저자는 "책을 쓰는 데 정치적 목표도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면서 "우리 문명은 생산적 노동이 아닌 그 자체가 목표이자 의미가 돼 버린 노동을 기초로 한다"며 "이 책이 우리 문명의 심장을 겨냥한 화살이 되기를 바란다"고 적었다.

데이비드 그레이버와 그의 칼럼이 실린 영국 매체 '스트라이크'의 2013년 여름호 표지. ⓒMarijan Murat

데이비드 그레이버와 그의 칼럼이 실린 영국 매체 '스트라이크'의 2013년 여름호 표지. ⓒMarijan Murat

저자가 불쉿 직업의 윤곽을 잡는 데 트위터로 수집한 증언 수백 건에 대한 질적 분석을 바탕으로 한 것도 그래서다. 다만 그는 금융자본주의 성장으로 불쉿 직업이 급증했다며 대체로 사무직을 겨냥한다. 저자는 앞서 2013년 기고문에서도 "간호사, 쓰레기 수거 요원, 정비공 등이 한순간에 사라진다면 세상이 난관에 봉착하겠지만 사모펀드 CEO나 광고 조사원, 보험 설계사, 텔레마케터 등이 몽땅 사라진다 해서 세상이 나빠질지는 분명치 않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렇다면 저자가 생각하는 불쉿 직업 증가에 대처할 해법은 무엇일까.

그는 보편적 기본소득을 제안한다. 이를 통해 생계와 노동을 분리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더욱이 무정부주의자(아나키스트)인 저자는 기본소득 도입이 불쉿 직업으로 가득찬 정부 관료 기구 폐쇄로 이어질 것으로 믿는다. 자연스럽게 관료 기구 확대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선별 복지 실행과 달리 보편적 복지에는 관료들의 감시·관리가 불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사무직의 사회 기여도가 낮다는 주장에서 출발해 기본소득 제안으로 넘어가는 논리의 흐름에 선뜻 공감하기는 어렵다. 저자가 서문에 밝힌 대로 정치적 성격이 강한 책이기도 하다. 하지만 자동화에 따른 일자리 감소 추세가 가속화하는 가운데 각 직업별 정체성을 재정의해야 하는 시기라는 점에서 일독의 이유는 충분하다.

불쉿잡·데이비드 그레이버 지음·김병화 옮김·민음사 발행·512쪽·2만2,000원

불쉿잡·데이비드 그레이버 지음·김병화 옮김·민음사 발행·512쪽·2만2,000원


김소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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