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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 학자의 비판적 인용 통해 생명 얻은 그리스 철학자들 [다시 본다, 고전]

입력
2021.09.02 15:00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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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
초기 그리스 사상가 단편 망라해 수록

편집자주

어쩐지 펼쳐 보기 두려운 고전을 다시 조근조근 얘기해 봅니다. 다수의 철학서를 펴내기도 한 진은영 시인이 <한국일보> 에 4주마다 금요일에 글을 씁니다.

요하네스 모레엘스 '헤라클레이토스'(1630). 구글아트프로젝트 캡처

요하네스 모레엘스 '헤라클레이토스'(1630). 구글아트프로젝트 캡처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이하 단편 선집)'은 기원전 6세기에서 기원전 5세기쯤 그리스 사상가들의 글을 모아 놓은 책이다. 원 저작은 사라졌지만,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심플리키오스 같은 후세 학자들의 책에서 직접 인용되거나 요약된 단편들이 수록돼 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말했다. "나는 나 자신을 탐구했다." 자기에 대한 궁금증은 인간의 보편적 속성인 것일까? 그러했기에 이 문장은 오랜 세월 동안 살아남았을 것이다. "페르시아의 왕국을 갖기보다 오히려 하나의 원인 설명(aitiologia)을 찾아내기 원한다." 원자론을 완성한 데모크리토스의 말이다. 그는 로또에 당첨되는 것보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의 원인을 알기를 더 원하는 사람처럼 원인 규명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화산 분화구에 몸을 던진 엠페도클레스는 말했다. "불화와 사랑은 여전히 맞서 싸우고 있다." 이 싸움에서는 누가 이길까? 애초에 사랑을 싸우게 만든 불화의 승리일지 모른다.

단편들은 저자가 하려던 이야기들을 원래대로 전해주지 않는다. 인용과 필사 과정에서 기록하는 이의 마음을 찌르는 것들만 남았다. 날렵한 사유의 조각을 읽다 보면 이런 상념들이 떠오른다. 첫째, 좋은 친구를 갖는 일이 중요하다. 사상을 오래 살아남도록 만드는 요소는 무엇일까? 소크라테스보다 그 이전 철학자들이 덜 위대했던 것은 아니다. 소크라테스는 책을 쓰지 않았지만 운 좋게도 문학적 재능을 갖춘 제자 겸 사상적 동료, 플라톤을 만났다. 그의 사상으로 간주되는 것들은 모두 플라톤의 훌륭한 각색을 거쳤고 그 덕분에 그는 철학자의 대명사로 남게 되었다. 그런데 같은 행운이 다른 이들을 찾아가지는 않았다. 고대 그리스 철학의 시초로 알려진 탈레스는 그리스의 일곱 현인 중 한 사람으로서 많은 이의 사랑을 받았지만 그의 철학을 체계화려는 열정을 지닌 추종자는 없었다.

둘째, 좋은 적을 갖는 일은 친구를 갖는 일만큼 중요하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훌륭한 적이기도 했다. 플라톤이 전하는 단편들을 보면, 그가 선배들을 풍자적으로 묘사하길 좋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별을 연구하느라 하늘을 보다 우물에 빠진 탈레스에 대해 "하늘에 있는 것들을 알려고 애썼지만 자기 뒤에, 그것도 바로 발밑에 있는 것들을 못 본다"는 놀림을 받았다고 전한다. 플라톤은 자기 사상을 집대성하려는 욕구에서 선배들의 말을 충실히 인용하기보다는 대부분 편집하고 비판했다. 하지만 그가 없었다면 서양 철학의 시작을 밝히는 일은 더욱 어려워졌을 것이다. 플라톤을 비롯한 후배 학자들의 비판적 인용문을 통해서 단편의 저자들은 망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승자와 패자가 종종 바뀌는 사유의 원탁 모임에 매년 출석하게 되었다.

셋째, 훌륭한 책들은 새로운 친구와 적이 계속해서 필요하다. 한 권의 책이 전자책으로 영구 보존된다고 해도 2,000년간 아무도 읽는 일이 없고 그 뒤에도 내내 없을 예정이라면 그것은 사라진 책과 다를 게 없을 것이다. '단편 선집'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 '인용된 단편들의 모음집' 이라는 형식을 통해, 인용될 수 없으면 어떤 책도 살아남기 힘들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이제 이 책이 더 오래 존재하려면 새로운 인용자, 새로운 비판자들과 만나야만 한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김인곤 외 옮김·아카넷 발행·957쪽·3만8,000원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김인곤 외 옮김·아카넷 발행·957쪽·3만8,000원

예상했을지 모르지만, '단편 선집'의 주인공 중 여성은 없다. 내가 대학 시절에 배운 철학자 중에도 여성은 없었다. 이후에 페미니즘 이론을 접하게 됐을 때 얼마나 신선했던가. 첫 장을 펼치기도 전, 표지에 박힌 여성 저자들의 이름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너희도 철학책을 쓸 수 있어! 여자 선수가 한 명도 없었던 고대 올림픽 경기장에 남장을 하고 구경 나온 여자들(발각되면 죽음을 면치 못했다고 한다)처럼 사유의 경기장을 더 이상 엿보기만 하고 있지 않아도 된다고 그 표지들은 속삭였다. 그리스 사상을 새롭게 조명한 한나 아렌트와 마사 누스바움의 철학서들, 그리스 고전문학 전공자인 앤 카슨의 아름다운 소설을 읽으면서 더 많은 여성들이 비슷한 희망을 경험할 것이다. 물론 이런 소식을 가장 반기면서도 몹시 긴장하게 될 이들은 '단편 선집'의 철학자들이다. 머지않아 그들은 더 많은 여성들, 즉 플라톤 이래 가장 열정적이고 풍자적인 인용자들을 만나게 될 테니까.

진은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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