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유족의 기부금으로 지을 감염병전문병원 설계를 내년에 착수하기로 했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15명 규모의 기부금운영위원회도 거의 꾸려져 막바지 준비에 들어갔다.
감염병전문병원 설립을 비롯한 공공의료 확충은 최근 총파업을 결정한 보건의료노조의 주요 요구사항이기도 하다. 민간 기부금까지 확보해놓고도 지지부진했던 사업이 보건노조 파업 위기를 맞고서야 움직이는 모습이다. 의료계는 이번엔 메르스 때의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4개월간 예산 조정만?
29일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의료계의 숙원인 감염병전문병원 설계가 내년 시작된다. 국립중앙의료원이 기존 건물을 이전, 신축하기 위해 확보해둔 80억 원과 올해 남은 중앙의료원 예산 12억5,000만 원을 합쳐 감염병전문병원 설계비 등 92억5,000만 원을 마련한다는 계획이다. 복지부 관계자는 "이렇게 마련한 예산으로 내년에는 어떻게든 감염병전문병원 설계에 들어갈 것"이라고 밝혔다.
감염병 진료를 비롯해 공공의료기관으로서의 역할을 강화하기 위해 중앙의료원은 당초 본원 부지를 현재의 서울 중구 을지로에서 서초구 원지동으로 이전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신축 부지가 중구 방산동으로 바뀌는 와중에 삼성의 기부금을 받게 됐다. 이 회장 유족은 지난 4월 감염병전문병원 건립과 감염병 연구에 써달라며 7,000억 원을 기부했다. 이에 복지부는 중앙의료원을 이전하면서 기부금의 취지에 맞는 감염병전문병원을 함께 짓기로 했다.
그러나 기부 4개월이 지났는데도 별다른 진척이 없었다. 감염병전문병원을 중앙의료원 본원 안에 둘지, 별도 부속병동 형태로 할지 등 구체적인 안조차 만들지 못했다. 감염병전문병원 건립 방향과 기부금 운영 방식을 논의할 기부금운영위가 구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복지부는 "중앙의료원 신축 부지가 변경되고, 거액의 기부금이 들어와 예산을 조정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복지부가 시간을 지체하는 사이 기획재정부는 내년 예산안 중 감염병전문병원 관련 부분(약 10억 원)을 오히려 삭감했다. 보건의료노조를 비롯한 의료계에선 거액의 민간 기부금을 받고도 사업 진행에 속도를 내지 못하는 복지부에 대한 비판이 높아졌다.
부랴부랴 복지부는 기부금운영위 출범에 속도를 내고 있다. "공무원, 감염병 전문가, 법조인 등이 포함된 15명 내외로 곧 출범해 감염병전문병원의 규모와 기능을 논의하기 시작할 예정"이라는 것이다. 복지부에 따르면 감염병전문병원의 음압병실 규모는 기존에 거론된 100병상보다 확대된 150병상 내외가 될 것으로 보인다. 또 감염병 긴급상황실과 종합 교육훈련 기능도 포함된다.
메르스 끝나니 무산됐는데...
의료계는 과거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MERS) 사태 때를 떠올리고 있다. 최재욱 고려대 의대 예방의학교실 교수는 “메르스 때는 감염병전문병원 설립을 추진하다 정작 유행이 끝나니 여야 합의로 무산시켰다"며 "정부가 이번에도 내년 대선 때문에 정치권 눈치를 보며 감염병전문병원 설립 추진을 미적거리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물론 섣부른 추진은 금물이다. 전문가들과 상의하며 구체적인 결정은 신중하게 하되, 논의 자체는 신속히 시작해야 한다는 게 의료계의 중론이다. 한편에선 중앙의료원의 단순 확장에 머무르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중앙의료원 이전과 무관하게 감염병전담병원을 별도로 만드는 방안까지 열어놓고 폭넓은 논의를 할 필요도 있다는 얘기다.
의료계 한 관계자는 "코로나19에 확진돼 지역 병원에 입원한 환자들이 서울의 대학병원으로 옮기고 싶어하는 경우가 많다"고 귀띔했다. 권역별 감염병 대응 수준을 전체적으로 끌어올리고, 감염병전문병원의 인력 교육훈련 기능에도 집중해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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