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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 역시 인류입니다

입력
2021.08.29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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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버나움’으로 보는 난민의 세계

편집자주

주말 짬내서 영화 한 편 보고 싶지 않으신가요. 이왕이면 세상사를 좀 더 넓은 눈으로 보게 해주거나 사회 흐름을 콕 집어주는 영화 말이에요. ‘라제기의 영화로운’은 의미 있는 영화 관람을 원하시는 분들에게 작은 도움을 드리려고 합니다.

영화 '가버나움'.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영화 '가버나움'.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사람들은 위를 올려다보는 것을 잊고 살고 있어. 수평적으로만 살지.”

영화 ‘주피터스 문’(2017) 속 아리안의 대사

요즘 아프가니스탄이 뉴스의 중심입니다. 극단적 이슬람주의 무장 정치단체 탈레반이 20년 만에 정권을 다시 잡게 된 과정이 충격입니다. 극단주의의 탄압을 피해 해외로 피신하려는 사람들이 늘면서 난민 유입에 대한 논란이 뜨겁습니다. 인류애를 발휘해야 한다는 입장과, 사회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는 주장이 맞섭니다(자세한 내용은 여기서☞ '아프간 난민 받아들여야 하나' 놓고 고개 드는 '이슬람 포비아').

국민 대부분은 난민들의 비참한 삶을 짧은 동영상과 사진, 기사 등을 통해 단편적으로 접해 왔습니다. 그들의 삶을 듬성듬성 책장 넘기듯 보기보다 한 번쯤은 돋보기를 들이대듯 살펴보는 건 어떨까요. 2018년 제71회 칸국제영화제 심사위원상을 수상한 ‘가버나움’은 난민 문제를 숙고하기에 좋은 영화입니다.

웨이브에서 ‘가버나움’ 바로 보기

①세파 견뎌내야 하는 12세 소년

영화 '가버나움'.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영화 '가버나움'.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주인공은 12세로 추정되는 소년 자인(자인 알 라피아)입니다.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 빈민가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는 여느 또래처럼 길거리에서 뛰어놀지만 친구들과 담배를 피는 모습이 심상치 않습니다. 자인의 일상을 보면 어른이나 다름없습니다. 학교에 가는 대신 가게에서 배달 일을 하고 동생들을 돌봅니다. 갖은 세파를 이미 다 겪은 듯 어른들에게 험한 말을 예사로 합니다.

자인의 집안 환경은 불우합니다. 부모님은 딱히 직업이 없어 보입니다. 가족 여럿이 비좁고 지저분한 공간에서 생활합니다. 자인은 걱정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아래 여동생 사하르(하이타 아이잠)를 가게 주인이 눈독 들이고 있어서입니다. 부모님은 가게 주인이 안겨줄 경제적 이익에 마음이 기운 듯합니다. 자인은 여동생과 도망칠 계획까지 세우지만, 사하르는 가게 주인과 강제 결혼하게 됩니다. 자인은 곧바로 집을 나옵니다.

영화 '가버나움'.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영화 '가버나움'.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자인은 놀이공원에서 일하는 라힐(요르다노스 시프로우)을 만나 친해집니다. 라힐은 위조 체류허가증을 지닌 불법 이주노동자입니다. 얼마 전 아기 요나스를 낳아 홀로 키우고 있습니다. 갈 곳 없는 자인과, 아이를 돌봐줄 사람이 필요한 라힐은 함께 살게 됩니다. 자인은 라힐이 출근한 후 요나스와 함께 하루를 보냅니다. 라힐은 자인을 전적으로 믿을 순 없지만 마땅히 대안이 없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세 사람은 행복한 공동체를 이룹니다.


②난민과 불법 체류자의 고단한 삶

영화 '가버나움'.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영화 '가버나움'.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부초 같은 삶을 사는 이들에게 행복은 오래 지속되기 어렵습니다. 라힐은 위조 체류허가증의 시한마저 얼마 안 남았습니다. 위조 체류증을 새로 만들고 싶으나 위조업자 아스프로가 요구하는 돈을 마련하기 어렵습니다. 아스프로는 라힐에게 부유층에 불법 입양시킬 수 있도록 돈을 받고 요나스를 넘기라고 채근하기도 합니다.

언제 적발될지 모를 불안감에다 돈까지 쪼들리던 라힐은 어느 날 집에 돌아오지 않습니다. 자인은 며칠을 요나스와 어렵게 지내다 라힐을 찾아 나섭니다. 시장에서 장사를 하는 시리아 난민 소녀를 만났는데 귀가 번쩍 뜨일 소리를 듣습니다. 소녀는 아스프로에게 돈을 주고 스웨덴으로 갈 날을 손꼽아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소녀가 스웨덴을 이상적 국가로 여기는 이유는 난민의 삶이 얼마나 힘겨운지 드러냅니다. “거기선 병에 걸려야만 죽어.”

영화 '가버나움'.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영화 '가버나움'.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자인은 스웨덴으로 가고 싶어 부도덕한 결단을 내립니다. 출생증명서 등이 필요해 집을 찾았다가 깜짝 놀랄 사실을 알게 됩니다. 분노한 그는 칼을 들고 범죄를 저지르게 됩니다.

③책임지지 않는 어른, 뒷짐 진 사회

영화 '가버나움'.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영화 '가버나움'.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자인은 구치소에 머물며 방송국에 전화를 걸어 부모의 학대를 고발합니다. 방송국의 도움으로 변호사를 고용해 부모를 재판정에 불러냅니다. “나를 태어나게 했다”는 이유에서입니다. 언뜻 보면 현실성이 결여된 부조리극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데, 영화는 자인의 고발을 통해 여러 메시지를 전합니다.

자인은 아이들을 낳아놓고 책임지지 않은 자신의 부모를 공박하려 합니다. 그는 자신의 출생신고를 하지 않아 존재하지 않은 존재(난민의 처지에 대한 은유로 볼 수 있습니다)로 만들어버린 부모가 야속하기만 합니다.

자인은 부모를 고발했지만 사실은 사회, 세상을 향해 분노를 터트린 겁니다. 이미 마음은 어른인 그는 자신의 부모가 어찌할 수 없었던 불우한 환경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습니다. 자인은 “자라서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존중받고 사랑받고 싶어요”라면서 "하지만 신은 그걸 바라지 않아요. 우리가 바닥에서 짓밟히길 바라죠"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불행이 구조적 문제에서 비롯됐다는 인식이 담겨 있습니다.

재판정에 나온 자인의 어머니는 판사가 자신을 나무라자 이렇게 말합니다. “죽을 힘을 다해 이렇게 사는데, 제 입장 돼 보고 그런 말씀하세요? 나처럼 살아 봤어요? ... 저 외엔 누구도 저를 비난할 수 없어요.” 자인 어머니의 절규는 무책임한 사회, 뒷짐 진 세상을 향한 외침이기도 합니다.


④신약성서의 교훈을 떠올리다

영화 '가버나움'.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영화 '가버나움'.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영화는 자인이 시리아 난민인지를 명확히 묘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인이 난민이라는 단서는 여럿입니다. 나딘 라바키 감독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장사를 하고 있던 12세 시리아 난민 자인 알 라피아를 거리에서 만나 캐스팅했습니다. 영화 속 대사 많은 부분에 자인의 의견이 반영됐다고 합니다. 영화는 허구지만 자인의 실제 삶인 것처럼 보이도록 다큐멘터리 기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제목은 옛날 이스라엘에 있었던 어촌의 이름입니다. 신약성서에선 예수가 많은 기적을 행했던 곳으로 묘사돼 있습니다. 예수는 기적을 행하고 많은 교훈을 전했는데도 메시아에 대한 가버나움 사람들의 믿음이 부족하자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합니다. 감독은 희망이라는 출구가 사라지고,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당연시된 세상을 신약성서의 한 대목에 빗대려 한 듯합니다.

영화에는 가슴 아픈 장면과 대사가 이어집니다. 무기력하고 무책임해 보이는, 자인의 아버지가 내뱉는 말이 난민의 현실을 고스란히 담아낸 듯해 유독 마음을 찌릅니다. “누가 너나 나에게 신경이나 쓸까 봐?... 우린 그냥 벌레야. 기생충이야. 서류 없는 삶을 인정하고 살든지, 창밖으로 뛰어내리든지 둘 중 하나야.”

영화 '가버나움'.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영화 '가버나움'.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난민은 어느 나라에서든 골칫거리로 여겨질 만합니다. 문화·종교적 차이를 지닌 낯선 사람들의 유입을 반기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촘촘히 연결된 시대에 누군가가 겪는 지옥도를 무작정 외면해야 할까요. 좀 더 힘 있는 나라, 좀 더 잘 사는 나라가 먼저 손 내밀어야 하지 않을까요. 누군가의 도움으로 적화를 막아내고, 전란을 딛고 일어선 우리가 서둘러 문을 닫는 건 깍쟁이 같은 행동 아닐까요.

영화가 끝날 무렵엔 이런 문구가 올라갑니다. ''가버나움’의 칸영화제 초청 후에 자인과 가족들은 유엔난민기구의 도움을 받아 2018년 8월, 노르웨이에 정착했다. 현재 14살이 된 자인은 생애 처음으로 학교에 다니게 됐다.' 희망은 결국 누군가의 선의에서 시작됩니다.

※ 지난 금요일 오전 한국일보 뉴스레터로 발송된 내용입니다. '라제기의 영화로운'을 좀 더 빨리 이메일로 받아보고 싶으시면 아래 링크를 눌러 구독 신청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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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제기 영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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