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미치지 않고서야' 정도윤 작가 인터뷰

드라마 '미치지 않고서야'에서 회사 구조조정을 담당한 인사팀장 당자영(문소리·왼쪽)은 상품기획팀 말단 직원으로 좌천된다. 첫 회의, 외계어 같은 개발 용어에 혼을 뺏긴다. 개발1팀 최반석(정재영) 수석을 찾아가 회의록 작성 조언을 요청하는 장면. MBC 제공
MBC 드라마 '미치지 않고서야'에서 18년차 회사원 당자영(문소리)은 '79년생 김지영'이다. '돌싱'인 당자영은 몸이 불편한 아버지의 생계를 책임지는 'K장녀'다. 장녀는 생활 밑천이라는 K장녀답게 그는 지나치게 책임감이 강하고, 때론 심각하게 몸을 낮출 줄 안다. 가부장제 속에서 자라 몸에 익은 습관 같은 것이다.

영화 '82년생 김지영'의 한 장면.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79년생 김지영' 당자영
그래서 당자영은 '존버(끈질기게 버티기란 뜻의 속어)'에 이력이 났다. 유리천장에 막혀 서울 본사에서 지방 사업부로 발령을 받아도, 회사에서 인사팀장을 맡겨 구조조정 '칼잡이'를 떠민 뒤 '꼬리 자르기'를 당해도 버티고 또 버틴다.
"보통 40대가 되면 부모님이 70대라 몸이 많이들 아프세요. 와중에 가장으로 치열하게 살아야 하는 게 40대 직장인들이고요. 그간 직장 드라마에서 여성은 억울한 여성 인턴들의 얘기가 주로 나왔잖아요. 식구를 부양해야 하고, 그러려면 밀리지 않게 치열하게 버텨야 하는 팀장급 여성 직장인도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요즘 인턴 못지않게 치열한 게 40대 직장인들이에요. 별별 꼴 다 당하면서 직장에서 가장 많은 서사를 갖고 있기도 하고요. 신입과 다른 결의 짠함이 있죠." 종방(26일) 전날 본보와 전화로 만난 '미치지 않고서야' 정도윤 작가의 말이다.

드라마 '미치지 않고서야'에서 인사 팀장이었던 당자영(문소리)이 개발1팀 최반석(정재영) 수석으로부터 개발 관련 업무를 배우고 있다. MBC 제공
자립, '문송'의 꿈
"나 같은 인사쟁이는 그것도 40대 여자는 재취업도 안 되거든?" 당자영은 두 남성 개발자 앞에서 이렇게 뼈를 때린다. K장녀인 당자영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문송(문과여서 죄송합니다)'이다. 40대 여성 그리고 '문송', 한국에서 나고 자라지 않았다면 어쩌면 그의 인생에서 크게 흉터로 남지 않았을지 모르는 배경. 결국 당자영은 이 사회가 낳은 아픈 손가락이다. 22년차 엔지니어 최반석(정재영)과 2~3년마다 몸값 올려 이직하는 게 취미인 소프트웨어 개발자 신한수(김남희)를 통해 그 상처는 더욱 도드라진다. 26일 마지막 방송에서 최반석은 결국 회사를 나온다. 생활가전 이상 사전 진단 소프트웨어를 독자 개발해 스타트업 회사를 세우고 인생 2막을 연다. 새로운 모험의 동반자는 투자 총괄을 맡은 당자영이다.
"직장인들이 꿈꾸는 게 회사에서 바짓가랑이 잡고 늘어질 때 뻥 차고 나가는 거잖아요. 그래서 차근차근 준비해 보란 듯이 나가는 회사원으로 카타르시스를 주고 싶었어요. '준비 못하고 나오면 퇴사는 지옥'이 현실이기도 하고요. 문송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게 '기술이 있어야 돼'잖아요. 그래서 자립의 꿈을 반석이란 개발자로 대리만족시켜 주고 싶었어요."

2017년 방송된 드라마 '마녀의 법정' 한 장면. KBS 제공
정 작가는 대본에 늘 시대의 불편한 공기를 담아 왔다. 정려원에 2017년 KBS 연기 대상을 안겨 준 '마녀의 법정'에서 여성아동성범죄의 심각함을 들춰 공감을 샀다. 이 드라마를 끝낸 뒤 그는 바로 '미치지 않고서야' 대본 작업에 들어갔다. 정 작가는 위태로운 회사원을 다룬 "오피스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4년을 준비해 '미치지 않고서야'를 내놨다. "처음엔 주위에서 드라마 제목이 직장드라마 같지 않다고 걱정했어요. 그런데 미치지 않고서야 직장 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밀고 나갔죠."
"C언어라니, 웬말예요"
지난달 마지막 회 원고를 탈고하기까지의 과정은 가시밭길이었다. 대학에서 어문 계열 학과를 전공했다는 '문송' 작가는 컴퓨터언어로 삶이 송두리째 흔들렸다.
"하드웨어 엔지니어에서 소프트웨어 개발자로 거듭나는 반석의 이야기를 쓰기 위해 C언어를 배우며 대본을 썼어요. 회로 설계 등을 다루는데 죽겠더라고요. 제겐 외계어잖아요. 유튜브 관련 영상 계속 틀어놓고 무식하게 외우는 수밖에 없더라고요."
정 작가와의 인터뷰는 15회 방송이 끝난 뒤 오후 10시 30분께 시작됐다. 작가는 극 중 반석 같았다. 말투는 덤덤했고, 간혹 요란하지 않게 툭 농담도 던졌다. 그는 "병원에 입원할 정도는 아니지만, 너무 고생해 당분간 재활이 필요하다"며 웃었다.
"건강을 잃었지만 얻은 건 배우들과 제작진이에요. 정재영 문소리 배우의 케미가 정말 좋았어요. '멜로를 기다렸다'는 반응이 나올 만큼요. 이상엽 배우도 욕받이가 돼 극을 빛내줬고요. 안내상 박원상 배우 등 창인공전 4인방은 현장에선 F4로 불렸어요. 온종일 힘들게 일하고 와 하루를 잊으려고 보는 게 드라마라고 생각해요. 공감을 하면서도 너무 우울하지 않게, 재미있게 쓰려고 나름 노력했는데 '시간 순삭' 하게 한 작품이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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