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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소한 기름 내음으로 ‘100년 가게’ 꿈꾸는 반백년 해동기름집

입력
2021.08.28 07:30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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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에 있는 해동기름집 전경. 왕태석 선임기자

서울 종로구에 있는 해동기름집 전경. 왕태석 선임기자

11일 서울 서대문형무소역사관 건너편의 한 골목. 무악동쪽 골목 어귀에 들어서자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코를 잡아 끈다. 기름 냄새를 좇아 발걸음을 옮기니 허름한 상가 1층에 ‘해동기름집’이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서대문형무소 관사 자리였다는 곳이다. 일곱 평 남짓한 가게 안엔 노부부가 나란히 앉아 일을 보고 있다. 1973년부터 기름집을 운영하고 있는 박명주(84)씨와 그의 부인 김세추(80)씨다.

7080년대 인기 기름집...종로에만 40곳 넘기도

지난 11일 서울 종로구 해동기름집에서 김세추(왼쪽)씨와 박명주씨가 깨를 고르고 있다. 왕태석 선임기자

지난 11일 서울 종로구 해동기름집에서 김세추(왼쪽)씨와 박명주씨가 깨를 고르고 있다. 왕태석 선임기자

인접한 홍제동에 살면서 택시 운전과 수예로 생업을 잇던 노부부는 우연찮은 기회에 지인의 소개로 해동기름집을 인수했다. "이름이 나쁘지 않다"는 생각에 인수 당시 상호 ‘해동’을 넘겨 받아 지금까지 쓰고 있다. 당시만 해도 종로구에만 기름집이 40곳 넘게 있었다는 게 노부부의 설명. 공장에서 대량으로 생산한 참기름과 들기름이 대세인 요즘과 달리, 1980년대까지만 해도 서울에서도 참깨와 들깨를 직접 구입해 기름을 짜는 동네 기름집들이 인기 있었다. 최근에도 전통시장에서 기름집의 명맥을 이어가는 경우가 있지만, 별도의 건물에서 기름집을 운영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해동기름집의 황금기는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이었다. 노부부는 “1970년대 후반이 아마 가장 장사가 잘됐던 때”라며 “기름 짜려고 사람들이 문밖에서 줄을 서서 기다릴 정도였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작은 박카스 병에 기름을 담아 팔기도 하던 때다.

48년 전 기름집을 인수하면서 60만 원을 주고 가게를 샀는데, 잘나가던 당시 한 달 매출이 20만 원을 넘겼다는 게 노부부의 기억이다. 그때보다 줄긴 했지만, 지금도 한 달에 30kg짜리 깨 7~10가마를 짜고 있다.

50년 가까이 가게를 이어올 수 있었던 데에는 변치 않는 노부부의 장사 철학이 있다. 진짜 깨, 좋은 깨만 착유한다. 가짜 참기름을 팔다 적발된 기름집들이 신문이나 TV뉴스를 장식하던 1990년대, 이문이 크다는 말에 미혹된 기름집이 더러 있었지만, 노부부는 꿀발린 말에 귀를 닫았다. 김씨는 “돈 좀 더 남기려고 다른 걸 섞어 팔던 기름집도 있었지만 우린 정직하게 장사를 하며 버텨냈다”며 “그 덕분에 지금까지도 문을 열고 장사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50년 단골도..."안산 수원 강화서도 찾아와"

지난 11일 서울 종로의 해동기름집에 기름을 짜는 기계들이 놓여 있다. 왕태석 선임기자

지난 11일 서울 종로의 해동기름집에 기름을 짜는 기계들이 놓여 있다. 왕태석 선임기자

노부부와 대화 중 가게 한쪽 문이 스르륵 열리더니, 한 손님이 들어와 거든다. “이 집 기름 먹다가 다른 데 가면 못 먹어.” 같은 상가에서 장사를 하던 이씨는 해동기름집 50년 단골, 이지순(79)씨다. 마트에서 손쉽게 기름을 구할 수 있는 요즘이지만, 아직도 이 집 기름만 고집한단다.

이씨처럼 오래된 단골이 해동기름집 명맥을 이어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맛을 보면 알지. 사람들이 그 맛을 잊지 못하고 찾아 오는 거야. 장사를 시작하고 한 번도 속여서 팔지 않으니까." 한 동네 살다가 경기 안산과 수원, 김포, 인천 강화 등으로 이사를 간 단골들은 지금도 해동기름집을 찾는다. “서울의 큰 병원에 왔다가 우리 기름 맛이 생각나 부러 오는 사람들도 있다우."

오랜 단골들은 본인도 본인이지만, 자식 집에 갈 때 들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자식들 손에 기름 한 병 쥐여주던 마음을 아직도 잊지 못해 찾아오는 단골이라는 얘기다. 단골뿐 아니다. 얼마 전까지는 서울 강남의 유명 한정식 집에도 20년 넘게 기름을 공급해 왔다. 노부부는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식당에서도 우리 기름을 쓸 정도로 맛은 일품”이라고 했다.

며느리가 대를 이어...손주들도 관심

서울 종로의 해동기름집을 운영하는 김세추(왼쪽부터)씨와 며느리 공지선씨, 박명주씨가 지난 11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왕태석 선임기자

서울 종로의 해동기름집을 운영하는 김세추(왼쪽부터)씨와 며느리 공지선씨, 박명주씨가 지난 11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왕태석 선임기자

50년 기름 장사로 노부부는 1남 1녀를 대학 공부까지 시키고 집도 마련해줬다. 자식 농사까지 큰 탈 없이 건사했다. 노부부의 아들과 2005년 시집 온 며느리 공지선(45)씨가 든든한 기름집 지킴이가 된 것도 노부부에게는 큰 복이다. 애들 유치원 데려다주는 길에 조금씩 시부모 일을 돕던 공씨는 가게 열쇠까지 넘겨받았다. 그는 "주로 오전에 제가 가게에 나와서 일을 하고 오후엔 시부모님이 나와 일을 하신다"며 "작은 공간에서 이뤄지는 일이지만 기름 짜는 일에 잔손이 많이 간다"고 말했다. 특히 온라인 등 과거와 달라진 판매 방식도 공씨를 바쁘게 한다. 공씨의 역할이 갈수록 커지고 있는 이유다.

깨를 씻는 과정부터 수분을 빼고, 석발기에서 잔먼지를 제거한 뒤 유압기를 통해 기름을 짜는 일이 힘에 부칠 때가 된 노부부다. 다른 곳으로 이사간 단골들을 위해 택배 주문을 받고 있는 것도 며느리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박씨는 “우리가 뭐 택배 주문이라는 걸 언제 해봤겠느냐"며 "며느리가 알아서 해주고 하니까 그런 주문도 받는다”고 했다.

서울 종로구 무악동 해동기름집 위치. 한국일보.

서울 종로구 무악동 해동기름집 위치. 한국일보.

공씨는 최근 홈페이지를 통해 온라인 주문까지 받고 있다. 아직 주문이 많지는 않다. 하지만 한번 입소문을 타면 언제 주문이 몰려들지 모른다는 기대감이 있다. 대형 포털 사이트의 쇼핑몰에도 입점했다. 공씨는 “온라인 주문에 익숙한 세대를 위해 생각해낸 것”이라며 “오늘 한 건 주문이 왔는데,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고 했다. 실제 주변 아파트 단지에 사는 젊은 주부들은 소문을 듣고 해동기름집을 출입하고 있다. 그들의 취향에 맞는 기름병을 구입하고, 참깨와 들깨 주문까지 이제 공씨가 하는 일이 더 많아지고 있는 셈이다.

정직 하나로 50년을 이어온 해동기름집은 ‘100년 가게’를 꿈꾸고 있다. 며느리 공씨 덕분이다. 또 이 모습을 보면서 자란 중학생 쌍둥이 손주들이 “다음엔 우리가 물려 받겠다"는 말을 대놓고 할 정도. 그들은 “50년 동안 양심적으로 장사를 해오면서 사람들로부터 평가를 받고 있는 게 이런 보람으로 돌아오는 것 같다"고 했다. 상가 재건축 문제만 해결되면 이 자리에 새로 들어설 건물에 ‘해동기름집’ 상호를 이어가겠다는 게 노부부의 꿈이다.

며느리가 일을 이어받으면서 5년 전까지 했던 고춧가루 빻는 일은 정리했다. 일종의 선택과 집중이다. 참기름과 들기름 외에 들깨차 등을 추가로 판매한다. 1,000만 원 상당의 유압기를 교체한 지도 5년밖에 되지 않는다. 참기름과 들기름용으로 나눠 구입했다. 50년 전통이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얘기다.

서울 종로의 해동기름집. 왕태석 선임기자

서울 종로의 해동기름집. 왕태석 선임기자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도 모르고 지나갔다는 해동기름집이고, 문턱 닳는 추석 대목이 가까워지고 있지만, 노부부의 얼굴엔 근심도 살짝 비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에 적잖은 타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김씨는 “IMF 때 주변에서 ‘힘들다, 힘들다’ 해도 우리는 장사가 잘되는 편이라 어려운 줄 모르고 살았다"며 “하지만 이번에 코로나는 다르다"고 했다. 그랬던 노부부지만 그들의 시선이 며느리한테로 옮겨가면 다시 또 밝아진다. 50년을 걸어온 해동기름집이 또 다른 50년을 시작하고 있기 때문에.

김성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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