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영문과 학과장 김지윤 교수. 어린 딸을 홀로 키우는 46세의 싱글맘.
드라마 주인공이라면 당연히 한국 작품을 떠올리겠지만 그는 영어권 시청자를 타깃으로 하는 미국 드라마의 주인공이다.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업체 넷플릭스가 20일 공개한 '더 체어' 이야기다. '더 체어'는 가상의 대학 펨브로크를 배경으로 영문학과 학과장으로 선출된 김지윤 교수의 험난한 여정을 그린다.
미국 드라마로선 드물게 한국인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 드라마는 백인 남성이 지배해온 펨브로크대 영문과에서 김지윤이 첫 여성 학과장이자 첫 유색 인종 학과장으로 뽑히는 것으로 시작한다. '온갖 잡것들 중 우두머리 잡것'이라는 장난스런 명패의 '자리'와 망가진 '의자'가 말해주듯 학과장의 업무는 온갖 골치 아픈 일의 연속이다.
인문학의 위기 속에 입지가 좁아지는 영문학과의 고민, 변화하는 학풍에 적응하지 못하고 고집을 부리는 노교수들, 신·구 교수와 백인·유색인종 교수 간의 갈등, 수업 내에서 파시즘을 언급하며 나치식 경례를 했다가 나치주의자로 몰린 동료 교수에 대한 학생들의 반발 등이 지윤을 괴롭힌다. 게다가 "엄마는 내 친엄마가 아니잖아"라며 속을 썩이는 멕시코 혈통의 여섯 살 입양 딸도 홀로 키워야 한다.
'더 체어'는 30분 분량의 6개 에피소드로 구성된 시즌 1만 파일럿 형태로 공개됐는데 벌써부터 평단과 시청자들 사이에선 호평이 쏟아지고 있다. 미국 영화·드라마 평점 사이트 로튼토마토에선 24일 현재 평론가와 시청자 모두 80%대를 기록하고 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세대 간의 차이와 대립을 진정시키려거나 진지하게 관심을 갖고 진단해보려는 작품이 드문 상황에서 '더 체어'는 진심 어린 탐색을 시도한다"고 평했다. 특히 드라마 '그레이 아나토미' '킬링 이브' 등으로 할리우드에서 입지를 굳힌 한국계 배우 샌드라 오에 대한 극찬이 쏟아진다. 미 일간 LA타임스는 "샌드라 오는 모든 연기의 영역을 아우르는 경이로운 배우"라며 "그는 작품의 결점을 자신의 연기로 메우며 작품을 이끌어 나간다"고 평했다.
'더 체어'는 오랫동안 배우로 활동해온 어맨다 피트가 기획, 제작하고 시나리오까지 함께 쓴 드라마다. 한국계 미국인의 삶에 초점을 맞춘 작품은 아니지만 영어와 한국어를 섞어 쓰는 한인 이민 가족의 모습, 한국식 돌잔치와 돌잡이 풍습 등 한인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다룬다. 심지어 집에 들어갈 때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모습까지 담았다. 제작자로도 참여하며 한인 문화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공한 것으로 알려진 샌드라 오는 미 일간 뉴욕타임스와 인터뷰에서 "김지윤은 내가 한 번도 연기해보지 못했던, 우리가 실제 살고 있는 방식에 따라 만들어진 캐릭터"라고 말했다.
한국 영화 '기생충'과 한인 이민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미나리'의 미국 내 성공을 계기로 이처럼 한국계 연출자와 배우들의 움직임은 더욱 활발해지고 있다. 재일한국인의 이야기를 다룬 재미교포 이민진 작가의 '파친코'는 애플TV플러스가 드라마로 제작 중이고, 한국계 배우 겸 감독 저스틴 전의 영화 '블루 바유'는 한국에서 미국으로 입양된 남성의 삶을 그려 올해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됐다. 같은 부문에 초청된 한국계 미국인 감독 코고나다의 영화 '애프터 양'도 좋은 평가를 받으며 미국 개봉을 준비 중이다. 한국에서 활동하는 감독, 배우들의 진출도 속속 이어지고 있다. 윤제균 감독은 미국 제작사와 함께 K팝 소재 영화를 제작 중이고, 배우 박서준은 마블 영화에 출연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내 영화·드라마에서 아시아 캐릭터의 비중은 10%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미미하다. 다만 최근 들어 소폭의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는 점은 반가운 대목이다. 지난 5월 미 서던캘리포니아대(USC) 아넨버그 포용정책센터가 발표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2009년부터 2017년까지 5% 안팎이던 미국 영화 속 아시아계 캐릭터는 2018년 9.6%, 2019년 8.4%를 나타냈다. 김효정 영화평론가는 “할리우드가 미국 내 흑인 커뮤니티에 이어 최근엔 아시아계 커뮤니티에 관심을 갖는 듯 보인다”며 "‘더 체어’ 같은 작품은 샌드라 오라는 배우가 아니었으면 제작되기 어려웠을 드라마인데 '더 체어'가 좋은 결과를 내면 아시아계 배우를 주인공으로 하는 작품이 더욱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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