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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오점 '국화 옆에서' 미당과 녹두장군 전봉준의 공통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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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오점 '국화 옆에서' 미당과 녹두장군 전봉준의 공통점은?

입력
2021.08.24 17:00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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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미당시문학관과 무장읍성

고창 부안면 고향 마을에 들어선 미당시문학관. 옛 초등학교를 개조한 건물로 문학관 입구를 담쟁이넝쿨이 덮고 있다.

고창 부안면 고향 마을에 들어선 미당시문학관. 옛 초등학교를 개조한 건물로 문학관 입구를 담쟁이넝쿨이 덮고 있다.

“교복과 교모를 이냥 벗어버리고 / 모든 낡은 보람 이냥 벗어버리고 / 주어진 총칼을 손에 잡으라! / 적의 과녁에 옥탄을 던지라! / 벗아, 그리운 벗아.” 애국심에 불타는 학도병에게 보내는 격문이라 해도 가혹하다. “마쓰이 히데오! … 그대는 조선 경기도 개성 사람 / 인씨(印氏)의 둘째 아들 스물한 살 먹은 사내 … 그대는 우리의 가미가제 특별공격대원”. 미당 서정주의 ‘헌시-반도학도 특별지원병 제군에게’와 ‘마쓰이 히데오 송가’의 일부다. 조선 청년들에게 일본 제국주의 전쟁에 참여할 것을 독려하는 내용이다.

기념관은 대개 고인의 업적을 예쁘게 포장하기 마련이다. 고창 부안면 서정주의 고향 마을에 들어선 ‘미당시문학관’은 그의 문학적 성취와 최대 치부인 친일 행적을 함께 전시하고 있다. 문학관 전체로 보면 아주 작은 부분이지만, 관람객에게 대한민국 대표 시인에 대한 역사적 판단의 근거를 던져 준다.

서정주는 ‘팔 할이 바람’이라는 담론집에서 자신을 친일파나 부일파라 부르는 데에 이의를 제기하며 ‘종천친일파(從天親日派)’라는 표현을 썼다. ‘하늘이 이 겨레에 주는 팔자’였다는 변명이다. 이 대목 역시 문학관에 전시돼 있다.

미당시문학관 계단에 그의 사진이 걸려 있다. 층층이 이어진 전시관 중 한 층은 그의 친일 행적을 전시하고 있다.

미당시문학관 계단에 그의 사진이 걸려 있다. 층층이 이어진 전시관 중 한 층은 그의 친일 행적을 전시하고 있다.


미당의 친일 작품을 걸어 놓은 전시관. 대한민국 대표 시인이라는 명성에 스스로 흠집을 낸 감옥처럼 보인다.

미당의 친일 작품을 걸어 놓은 전시관. 대한민국 대표 시인이라는 명성에 스스로 흠집을 낸 감옥처럼 보인다.


미당시문학관 옥상 전망대에 오르면 너른 들판 너머로 부안 변산반도 능선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미당시문학관 옥상 전망대에 오르면 너른 들판 너머로 부안 변산반도 능선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미당시문학관은 옛 봉암초등학교 선일분교를 개·보수해 지었다. 담쟁이넝쿨이 늘어진 사각 교문으로 들어서면 일직선 단층 건물이 단아한데, 뒷산과 조화를 고려해 가운데를 솟게 증축했다. 전체적으로 아담하면서도 고풍스럽다. 문학관 옥상 전망대에 오르면 좌우로 고향 질마재 마을 풍경이 부드럽게 펼쳐지고, 정면으로는 간척지의 너른 들판과 고창갯벌 너머로 변산반도의 산 능선이 그림처럼 이어진다. 대표작 ‘국화 옆에서’처럼 그립고 아쉽고 누이처럼 푸근하다. ‘아무 말이나 붙들고 놀리면 그대로 시가 되는 경지에 이른(문학평론가 윤종호)’ 그의 시어와 더없이 어울릴만한 풍경이다. 미당은 이 마을에서 태어나 9세까지 서당에서 한문을 익혔고, 부안으로 이사해 줄포공립보통학교를 다녔다. 문학관 바로 옆에 생가가 있고, 묘소도 인근이다.

친일 행적으로 문학적 성취에 커다란 흠집을 남긴 미당의 고향 고창은 구한말 폭정과 외세에 맞선 동학혁명의 고향이기도 하다. 미당시문학관에서 직선으로 불과 1.3㎞ 정도 떨어진 곳에 동학농민군 3대 지도자 손화중이 체포된 집이 있다. 전주 이씨 재실 건물인데 마당 한쪽에 농자재가 쌓여 있는 등 관리가 허술해 보인다. 풀에 덮인 안내판 글귀도 희미하게 색이 바래 있다.

동학혁명 지도자 손화중이 체포된 집. 미당시문학관에서 직선으로 1.3㎞가량 떨어져 있다.

동학혁명 지도자 손화중이 체포된 집. 미당시문학관에서 직선으로 1.3㎞가량 떨어져 있다.


고창읍 당촌마을의 전봉준 생가터. 박석과 함께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고창읍 당촌마을의 전봉준 생가터. 박석과 함께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고창 공음면의 동학기포지 기념공원에 당시 지도자들의 이름을 쓴 깃발이 걸려 있다.

고창 공음면의 동학기포지 기념공원에 당시 지도자들의 이름을 쓴 깃발이 걸려 있다.

고창 읍내 외곽의 당촌마을은 동학농민운동의 상징적 인물인 전봉준이 태어난 곳이다. 군에서 주변 토지를 매입해 2000년 생가를 복원했다가, 가난한 농민의 초가집으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지적에 다시 허물어 현재는 공터로 남아 있다. 생가 터를 알리는 반석과 함께 녹두장군을 연상시키는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공음면 구수마을에는 동학기포지 기념공원이 있다. 1894년 1월 고부에서 봉기한 농민들은 군수 조병갑을 축출했다. 그러나 민란을 수습하기 위해 파견된 안핵사 이용태가 조사 과정에서 농민들에게 극심한 횡포를 부리자 전봉준을 위시한 지도부는 3월 20일 이곳에서 ‘무장포고문’(당시 지명은 무장현이었다)을 발표하고 재봉기를 선언한다. 무장기포는 고부 농민봉기가 전국으로 확대되는 시발점이었다. 국도변에 조성된 기념공원에는 동학농민혁명 발상지 기념비와 전봉준 손화중 등 농민군 지도자 깃발 등이 세워져 있지만, 역사적 상징성을 담기에는 부족해 보인다.

인근 무장읍성 역시 당시 동학군이 점령한 곳이다. 무장기포 후 고창 부안 정읍 등을 거치며 세몰이를 하던 농민군은 1894년 4월 9일 무장읍성에 도착해 수감 중인 동료 40여 명을 풀어주고, 군기고를 파괴해 무기를 탈취했다. 이 과정에서 아전과 군교 10여 명이 사망하고 평소 평판이 좋지 않았던 양반 지주의 집이 불탔다. 농민군은 관아에서 10리쯤 떨어진 호산(여시뫼)에 진을 치고 3일을 머문 뒤 영광으로 이동한다. 이때 농민군의 수는 1만여 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무장현 관아와 객사가 있었던 고창 무장읍성. 조금씩 복원을 계속해 옛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다.

무장현 관아와 객사가 있었던 고창 무장읍성. 조금씩 복원을 계속해 옛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다.


무장읍성 객사 앞 팽나무 군락 아래에 역대 수령의 선정비가 나란히 놓여 있다.

무장읍성 객사 앞 팽나무 군락 아래에 역대 수령의 선정비가 나란히 놓여 있다.


무장읍성 동헌 앞 연못에 연꽃이 화사하게 피어 있다.

무장읍성 동헌 앞 연못에 연꽃이 화사하게 피어 있다.

무장읍성은 조선 태종 17년(1417) 무송현과 장사현을 무장진으로 통합하며 쌓은 성이다. 둘레 1,443m로 성내에 객사, 동헌, 진무루 등 옛 건물이 남아 있다. 동학혁명 당시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었는데, 지역 아전들이 거의 동학교도이거나 자발적으로 협조했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남문인 진무루를 중심으로 일부 성벽이 복원돼 있다. 객사 앞 오래된 팽나무 군락과 동헌 앞 연못 등이 어우러져 고풍스러운 운치를 되찾아가고 있다.

고창=글ㆍ사진 최흥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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