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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 환자다"… 장르가 된 질병 내러티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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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 환자다"… 장르가 된 질병 내러티브

입력
2021.08.24 18:00
수정
2021.08.24 18:34
18면
0 0

거식증·조현병·류머티즘… 질병 경험 에세이 봇물
'의료인류학' 출간도 시동… 아픔의 사회적 성격 살펴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제가 아픈 몸에 대한 우리 사회의 태도와 문화를 성찰해 보자고 주장하기 시작한 2015년만 해도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는 말이 아픈 몸을 소외시키는 말이라고 하면 '올바른 헛소리'라는 냉소가 돌아왔죠. 지금은 공감의 목소리가 더 많아요. 질병 경험을 담은 책이 많아지면서 질병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는 걸 느낍니다.

여성·평화·장애 관련 활동가 조한진희

2019년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동녘) 출간과 함께 '잘 아플 권리'라는 의미의 '질병권(疾病權)' 개념을 제안한 여성·평화·장애 관련 활동가 조한진희씨는 질병과 함께 살아가는 여성 4명의 이야기를 담은 새 책 '질병과 함께 춤을'(푸른숲)에도 이름을 올렸다. 그는 여성주의 매체에 동명의 제목으로 연재된 글을 책으로 엮었다. 두 책은 최근 서점가에 쏟아지고 있는 당사자성이 두드러지는 질병 관련 책 중 일부다. 특히 자신이 앓고 있는 질병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이를 다스리며 살아가는 일상을 그린 에세이가 꾸준한 호응과 함께 출간이 잇따르고 있다. 불과 몇 년 전까지 질병과 관련한 책은 의사 등 전문가의 의학 지식을 전하는 형식이거나 질병 극복 경험을 성공기처럼 그린 회고록이 많았지만 이제는 아픈 몸으로 사는 경험을 있는 그대로 써 내려간 책이 많다.

극복 대상에서 공생관계 된 질병

박지니 지음 '삼키기 연습'(글항아리)

박지니 지음 '삼키기 연습'(글항아리)

최근 몇 달 사이에 나온 질병 서사 에세이만도 여러 권이다. 자신이 양극성장애(조울증) 환자인 동시에 수많은 정신질환자를 만나온 저자 리단(필명)이 쓴 정신질환 경험기 '정신병의 나라에서 왔습니다'(반비), 20대 회사원 정지음씨의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 진단·치료기인 '젊은 ADHD의 슬픔’(민음사), 서른이 돼서야 ADHD 진단을 받은 임상심리학자 신지수씨의 '나는 오늘 나에게 ADHD라는 이름을 주었다'(휴머니스트), 약 20년에 걸친 거식증 경험기인 '삼키기 연습'(글항아리) 등이 잇따라 나왔다. 미국 시인 앤 보이어가 자신의 암 투병기를 기록한 '언다잉'(플레이타임)도 지난달 말 번역 출간됐다.

최근 나온 투병 에세이들. '정신병의 나라에서 왔습니다(왼쪽부터)', '젊은 ADHD의 슬픔’, '나는 오늘 나에게 ADHD라는 이름을 주었다', '언다잉'.

최근 나온 투병 에세이들. '정신병의 나라에서 왔습니다(왼쪽부터)', '젊은 ADHD의 슬픔’, '나는 오늘 나에게 ADHD라는 이름을 주었다', '언다잉'.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닌 책이지만 질병을 감춰야 할 문제이자 극복 대상으로 보는 대신 안고 가야 할 일상으로 그린다는 공통점이 있다. 자신의 질병 이야기를 밖으로 끄집어내는 저자들의 태도는 갈수록 적극적이다. '삼키기 연습'의 저자 박지니씨는 책을 내겠다고 직접 출판사에 투고했다. 박씨는 "근래에 다양한 질병 회고록이 나오면서 질병을 결점으로 바라보는 시선도 많이 옅어져 솔직한 질병 이야기를 내놓을 수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난소낭종·조현병·척수성근위축증·류머티즘을 겪고 있는 저자들의 경험을 담은 '질병과 함께 춤을'을 엮은 조한진희씨는 10월쯤 질병 서사 책을 추가로 출간할 예정이다. 지난해 기획한 연극 '아프지만 미안하지 않습니다'에 참여한 시민배우 6명의 질병 서사를 책으로 정리한 형식이다.

수치스러운 질병은 없다

조한진희 엮음 '질병과 함께 춤을'(푸른숲)

조한진희 엮음 '질병과 함께 춤을'(푸른숲)

이 같은 투병 에세이뿐 아니라 그동안 국내에서 보기 힘들었던 서사의학·의료인류학 서적이 잇따라 출간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의료의 영역에서 의사의 전문 지식과 과학적 근거 못지않게 사람의 이야기에 주목해야 한다는 주장을 담은 책들이다.

지난달 초 나온 번역서 '서사의학이란 무엇인가'(동아시아)는 의사가 환자의 인간적 삶에 귀기울여야 한다고 말하는 서사의학을 설명한 책이다. 문학적 글쓰기 훈련 등 미국 컬럼비아대의 서사의학 석사과정 프로그램을 책으로 연구하고 발전시켰다.

'의료인류학연구회' 소속 학자 13명이 공저자로 참여한 '아프면 보이는 것들'(후마니타스)도 이달 초 출간됐다. 한국사회의 다양한 아픔의 경험을 생물학적·의학적으로만 접근하지 않고 사회문화적으로 접근했다.

'아프면 보이는 것들'에 공저자로 참여한 김태우 경희대 한의과대 교수는 "미국의 경우 환자의 경험 서사가 하나의 장르로 자리잡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이 나와 있지만 과거 한국의 질병 서사는 권위 있는 전문가의 의학 지식에만 방점이 찍혀 있었다"고 책 출간 배경을 밝혔다. 그러면서 "한국사회가 엘리트주의에서 다양성을 포용하는 방향으로 옮겨가듯이 의학에서도 환자 입장의 다양한 목소리가 드러나고 있는 셈"이라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으로 의료 분야의 사회적 주목도가 높아지고 있어 앞으로 더 많은 환자 경험 서사가 나오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리타 샤론 외 지음 '서사의학이란 무엇인가'(동아시아), 제소희 외 지음 '아프면 보이는 것들'(후마니타스).

리타 샤론 외 지음 '서사의학이란 무엇인가'(동아시아), 제소희 외 지음 '아프면 보이는 것들'(후마니타스).


김소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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