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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주 이주 1세기 만에 고국 오는 홍범도 장군 유해...온라인으로 추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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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주 이주 1세기 만에 고국 오는 홍범도 장군 유해...온라인으로 추모한다

입력
2021.08.13 13:30
수정
2021.08.13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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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광복절 맞춰 카자흐스탄서 유해 봉환?
1995년 YS정부 때부터 봉환 추진 진행
고려인들 원치 않고, 후손 끊겨 봉환 시기 늦어져
16·17일 대전 현충원·온라인 통해 '국민추도기간'
우원식 "독립전쟁기념공원 만들어 모셔야"

1922년 1월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한 홍범도(왼쪽) 장군과 최진동 장군. 독립기념관 제공

1922년 1월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한 홍범도(왼쪽) 장군과 최진동 장군. 독립기념관 제공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승리하고 1921년 연해주로 이주한 이후 100년 만에 고국 땅으로 돌아오는 여천(汝千) 홍범도(1868~1943) 장군의 유해 봉환에 맞춰 정부가 16, 17일 이틀 동안 국민추도기간을 갖기로 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해 온라인을 통한 추모도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의원 겸 홍범도장군 기념사업회 이사장은 13일 MBC 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에서 "홍범도 장군의 유해 봉환이 15일 저녁 때 이뤄져 바로 대전 현충원에 임시로 모시고, 18일 안장식을 가질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어 "16, 17일 이틀 동안 국민추도기간으로 정해 대전 현충원에 공간을 만들어 추도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며, 온라인으로도 추도할 수 있게 공간을 만들 계획"이라고 말했다.

국가보훈처는 이날 황기철 국가보훈처장을 단장으로 한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을 위한 대통령 특별사절단이 14일 오전 서울공항에서 공군 특별수송기로 출발한다고 밝혔다. 공군 특별수송기는 지난해 6월 북한에서 발굴돼 미국 하와이로 옮겨졌던 6·25 한국전쟁 국군 전사자 유해 봉환 임무를 수행했던 다목적 공중급유수송기인 KC-330(시그너스)인 것으로 전해졌다.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 있는 홍범도 공원 내 홍범도 장군 흉상. 김진석 사진작가 제공·연합뉴스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 있는 홍범도 공원 내 홍범도 장군 흉상. 김진석 사진작가 제공·연합뉴스

홍범도 장군은 백두산과 만주 벌판을 누비며 일본군을 토벌하면서 일본군에게는 '하늘을 나는 장군', 우리 민중들에게는 '백두산 호랑이' 등으로 불리며 추앙받았다.

그는 1907년 함경도와 평안도 일대의 포수들을 중심으로 의병을 조직했고, 1910년 한일강제 병합 전후 국경을 넘어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북간도에서 '대한독립군'을 창설해 함경도 혜산진의 일본군 수비대를 습격하는 등 국내 진공작전을 전개했다.

1920년에는 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을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영화 '봉오동전투'에서 배우 최민식이 홍범도 장군 역을 맡았다. 같은 해 10월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 장군의 대한독립군 등 독립군 연합 부대가 나서 일본군을 크게 이긴 것이 청산리 전투다.

홍범도 장군은 1923년 군복을 벗고 연해주 집단농장에서 일하다 1937년 11월 스탈린의 한인 강제이주정책으로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으로 이동했다. 이듬해 4월 크즐오르다로 이주한 그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고려극장의 수위 등으로 일하며 말년을 보내다 1943년 세상을 떠났다.


홍범도 장군, 고려인들 정신적 지주...후손 없어 봉환 늦어지기도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 있는 홍범도 공원의 입구인 통일문. 김진석 사진작가 제공·연합뉴스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 있는 홍범도 공원의 입구인 통일문. 김진석 사진작가 제공·연합뉴스

우 의원에 따르면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은 1995년 김영삼 정부 때부터 추진됐던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고려인들이 정신적 지주이자 민족적 지도자로 홍범도 장군을 추앙하고 있던 터라 유해 봉환이 쉽지 않았다.

또 고려인들은 돈을 모아서 묘역을 제대로 조성하고 그곳에 추모비, 흉상을 만들어 세우는 등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멀리 떠나는 걸 원치 않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우 의원은 이에 "그렇지 않아도 어려움이나 고난을 겪은 분들인데 그들의 정신적 지주를 멀리 떠나보내는 게 서운한 일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홍범도 장군의 후손이 없어 유해 봉환이 늦어졌다고 한다. 우 의원은 "홍범도 장군의 부인은 일본군에 인질로 잡혀있다 숨지셨고, 두 아드님도 1908년 전투에 나가서 운명을 달리하시면서 손이 끊겼다"며 "유해 봉환을 하는데 후손들의 입장이 굉장히 중요한데 후손이 없어서 추진이 잘 안 됐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우 의원은 "독립전쟁기념공원을 만들어 모셔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재 홍범도장군 기념사업회에서는 독립전쟁기념공원 사업 계획을 거의 확정했고, 국민적 동의와 예산 등을 위한 절차를 마련하고 있다고 우 의원은 전했다.

강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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