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출신 미국 역사가 얀 그로스가 2000년 펴낸 '이웃들'은 폴란드에 큰 충격을 안겼다. 1941년 인구 3,000여 명의 작은 마을인 예드바브네에서 1,600여 명의 유대인이 학살당한 사건을 다뤘는데, 문제는 학살의 규모가 아니라 학살의 주체였다. 흔히 알려진 대로 독일 나치가 아닌 유대인들과 오랜 기간 이웃으로 지냈던 폴란드인이었다는 사실은 폴란드의 굳건한 희생자의식에 균열을 내며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다. 일본계 미국인 작가 요코 가와시마 왓킨스가 1986년에 쓴 자전적 이야기 '요코 이야기'가 2007년 뒤늦게 논란의 중심에 섰다.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한 직후 11세 소녀였던 작가와 그 가족이 일본 귀국 과정에서 겪었던 생명의 위협, 성폭력의 공포 등을 묘사한 책인데 한국인을 가해자로, 일본인을 희생자로 그려 역사를 왜곡했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역사학자 임지현 서강대 사학과 교수는 이 같은 현상을 보면서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라는 개념을 떠올렸다.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는 희생자라는 의식을 세습하고 집단의 기억을 공유하는 과정을 강화하면서 민족주의를 고취하는 행태를 가리킨다. 기억 연구에 천착해온 임 교수는 신간 '희생자의식 민족주의'에서 누가 더 '우월한 희생자'인지 다투며 민족 간의 갈등만을 부추기는 21세기 기억 전쟁 속 희생자의식 민족주의가 얼마나 위험한지 지적하며 이를 넘어 연대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한다.
임 교수의 이번 책은 전작 '기억전쟁'(2019)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그는 당시 과거 비극의 가해자와 공범자가 희생자로 둔갑하는 가운데 누가 더 큰 희생자인지를 놓고 희생자와 다른 희생자 간에, 희생자와 가해자 간에 기억 전쟁을 펼치고 있다는 점을 꼬집었다. 이번 저서에선 구체적 사건에서 가해자와 피해자가 나뉘는 것이 아니라 집단의 기억과 의식에 따라 민족이나 국가 단위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나뉘고, 이것이 민족주의를 강화하는 점에 주목했다.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는 지구적 기억 공간에서 만나 서로 경합하고 타협하고 연대하는 기억의 지구화 현상을 거친다.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임을 자처하는 일본과 일본 식민주의의 피해자인 한국이 홀로코스트라는 보편적 기억과 자신들의 기억을 연결시키려 하는 시도가 대표적이다. 저자의 시선은 한국과 일본에 그치지 않는다. 식민주의 제노사이드(집단학살), 나치의 홀로코스트, 스탈린주의 테러에 대한 삼중의 희생자의식이 얽힌 기억의 관점에서 폴란드, 독일, 이스라엘, 한국, 일본의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를 집중적으로 분석한다.
임 교수는 가해자들이 탈역사화를 통해 자신들을 희생자로 재구성하는 문제점과 한국과 폴란드, 이스라엘 등 희생자의식으로 무장한 국가의 가해자들이 희생자 민족의 일원이라는 이유로 개인적 범죄행위에 '집합적 무죄' 판결을 받는 '과잉역사화' 문제도 꼬집는다. 용서라는 것이 가해자와 희생자 간의 화해에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양측 모두에게 정치적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점도 거론한다.
저자는 단순히 가해자, 피해자 모두 잘못하고 있다는 양비론적 주장을 하려는 게 아니다. "누구든 특정한 역사적 조건 속에 놓이면 끔찍한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반성적 기억이야말로 인류의 근대 문명에 내장된 잠재적 식민주의와 홀로코스트를 제어하는 무기"라는 점을 강조한다.
임 교수는 적대와 혐오를 낳는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를 희생하고 기억의 연대를 이루자고 제안한다. "자기 민족의 희생을 절대화하고 타자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 뒤에 줄 세우는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를 희생할 때, 기억의 연대를 향한 첫 관문이 열릴 것"이라면서 말이다.
임 교수가 베를린 강연 도중 들었다는 말처럼 그의 통찰은 관련된 모든 당사자를 불편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일본과의 적대적 관계를 넘어 공존과 연대로 나아가려 한다면 한 번쯤 진지하게 정독해볼 만한 연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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