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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가끔 쓰지만, 설탕은 항상 달아서

입력
2021.08.11 05:00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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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설탕에 대하여

편집자주

독창적 문체로 남성 패션지 ‘GQ’를 18년간 이끌어온 이충걸 전 GQ 편집장이 문화 현상의 이면을 새롭게 들춰 봅니다. 현재 서울 필동에 사는 이 전 편집장의 ‘멘션(mentionㆍ촌평)’은 격주 수요일 자 <한국일보> 에 실립니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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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살 때 부모님은 공화춘이라는 중국집에서 탕수육을 사주셨다. 그날 태어나 탕수육을 처음 먹었다. 그러나 끝을 조금 씹다 말고 포크를 놓았다. 엄마는 더 먹으라고 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 탕수육은 달았다. 못 참을 만큼 달았다.

그때 충치 방지 강령에 다 적혀 있었다. 설탕은 뚱보의 수를 배로 늘리고, 이빨을 완전히 썩게 한다고. 세월 따라 몇 가지가 추가되었다. 설탕은 제2형 당뇨와 심장병의 원인이며, 때로 혼수상태에 빠지게 하고, 아이들이 제자리에서 빙빙 돌며 소리치게 만든다고.

엄마는 커피를 아주 좋아하셔서 하루에도 몇 잔을 마셨다. 설탕을 거의 다섯 스푼 들이붓곤 시럽 같은 커피를 마셨다. 설탕으로 진득진득해진 컵은 세계 설탕 시장의 미니어처 같았다. 어느 정도가 ‘너무’ 많은 것인가는, 성인인 우리가 술과 담배의 적정량이며 개수를 결정하듯 개인의 선택에 달렸을 것이다. 부작용을 고려하고 스스로 정할 것. 나는 설탕의 중독적 측면은 아이를 기르는 이들한테나 강조되는 줄 알았다. 그녀에게 너무 달다는 것은 없었다. 아기같이 달수록 더 좋아했다. 가끔 헷갈렸다. 만족을 위한 필요 욕구는 생리적인 것일까, 사회적인 것일까? 설탕은 사랑이 아니지만 사랑처럼 느껴진다는 것에 나는 거의 좌절했다. 그리고 엄마에게 최소한의 설탕을 드리곤 더 찾지 못하게 숨기는 것이 나의 주된 하루 일과가 되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주변의 모든 것이 설탕 공장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콜럼버스가 사탕수수를 신세계에 들여왔을 때 설탕은 단지 이국적인 호사에 불과했을 것이다. 설탕은 곧 엄청난 증식성으로 세상을 실험실로 바꾸었다. 사람들은 거의 모든 것을 먹었다, 그게 달다면. 결코 외면할 수 없는 MSG(아미노산계 조미료)의 감칠맛 수용체는 단맛 수용체처럼 다양한 결합 부위가 있어 천연인 척 인공적인 맛으로 식품 속을 떠다니며 설탕이 하는 일을 조용히 따라 하고 있었다. 콜럼버스는 사탕수수 말고 다른 것도 몇 가지 더 가지고 왔다. 결국 사람들은 양성적인 마조히즘 환자가 되어 매일 전 세계 어른의 4분의 1정도가 먹는 고추를 먹고, 한약보다 더 쓴 커피를 마신다. 또 같은 이유로 롤러코스터를 타고 공포 영화를 본다. 위험하다는 생각을 몸이 속이려고. 그리곤 즐기는 것이다.

설탕이 질병에 미치는 영향을 인정하거나 부인하는 역사는 아주 길게 이어졌다. 미디어는 날마다 설탕이 몸에 미치는 생리학적 신진대사적 내분비학적 영향에 대해 떠든다. 사람들은 설탕의 필요와 불필요를 두고 양극화되었다. 두 관점은 수도 없이 대립하다가 설탕이 살충제처럼 무서운 식재료로 취급받기 시작하자 추가 기울었다. 설탕을 적대시하는 대중 보건의 지배적인 흐름을 생각하면 가까운 미래엔 일정량의 설탕이 든 탄산 음료 판매 금지법이 나오지 않을까, 싶을 정도이다. 그 음료 10mL당 100원씩 세금을 부과하거나, 과체중 직원의 잘못을 설탕에서 찾으며 고과에 반영하는 식으로. 문득 궁금해진다. 설탕의 부작용을 경고한 최초의 영양학적 거물은 누구였을까?

다이어트 콜라 캔 하나를 상상하면 누군가 그것을 들고 있는 광경이 떠오른다. 그 얼굴을 확대하면 꼭 그 사람이 보인다. 아무리 봐도 비만인 사람들이. 설탕을 줄이는 것은 일부에겐 단순한 건강 문제가 아니라 생사가 달린 숙제가 되었다. 인색하기 짝이 없는 표준 체형 기준으론 여차하면 과체중이 되는 세상에 비만은 폭식과 나태라는 두 개의 원죄를 부른다. 그래서 모두가 합산된 총 칼로리를 탓하고, 설탕을 탓한다. 먹는 것은 우리 몸을 만들지만 우리가 누구인지 말해주진 않는다. 그러나 어느 소녀가 피자 말고 아무것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소녀보다 그 아이가 사는 세상에 대해 말해줄 것이다.

세상은 도저히 설탕과 밀가루를 끊을 수 없는 중독자들 천지가 되었다. 기분이 나쁘고 예민해져서, 뭘 먹어도 먹은 것 같지 않아서, 뭐든 맛있게 먹으면 몸에 좋은 거라고 핑계를 대는. 가끔 그걸 끊는 게 생각보다 쉬웠다는 이들도 있다. 설탕 없이 보름을 보낸 누군가는 생각도 못한 데서 단맛을 발굴했다. 방금 씻은 채소에서, 유기농 플레인 요구르트에서, 심지어 맹물 한 잔에도 머리가 핑핑 돌 만큼 단맛을 느꼈다. 그러나 그렇게 강인한 현대의 영웅이 몇 명이나 될까.

나는 설탕 대신 다른 것을 찾기 시작했다. 칼로리를 줄인 설탕 대체재, 자연에서 왔다는 꿀, 죄책감을 살짝 가리는 코코넛 슈가를. 그 과정 속에서 감미료를 발명하는 일은 식품학의 가장 어려운 주제였다는 걸 알았다. 그건 콜라 맛을 흉내 내는 것 정도가 아니라 물을 똑같이 만드는 것과 같은 굉장한 일이라는 것을.

염소 원자 세 개로 설탕의 몇천 배 단맛을 내는 인공 감미료는 설탕을 갈망하는 결과물이자 제한하려는 시도. 미래는 수만 가지 화학으로 만든 혼합의 세계일 것이다. 그러나 종이 없는 책이나 영원히 교통 체증 없는 슈퍼 하이웨이의 꿈처럼, 단것을 원하는 사회의 필요는 자연스러운 한계에 맞닥뜨렸다. 설탕의 문제는 그보다 더 나은 것을 만들 수 없다는 데 있었다!

설탕의 빠른 한 방에 미치지 못하는 사카린의 느리게 올라오는 쓴맛과 뒤를 마무리하는 금속의 맛, 강하고 직접적이지만 혀가 느끼기까지 시간이 좀 걸리는 아스파탐의 느린 맛, 친구들의 실수를 다 모은 것 같은 스테비아의 쓴맛, 결국 무엇과도 어울리지 않는 맛... 인공 감미료 분자는 혀에 무차별 사격을 하고 즉각적으로 미뢰를 자극하며 미각 수용체를 추적하지만 나중에는 흔적도 남지 않는다. 미각에 민감한 이들도 입안에 독특한 촉감을 남기는 흰 가루의 맛을 좋아할까? 다디단 세상에 그것들은 저마다의 역할을 하지만 답이 될 수 없었다. 매번 맛이 복잡하게 변하기 때문에. 그렇지만 설탕은 언제까지나 달달한 맛을 내는 것이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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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달콤함의 전문가. 갓난아기조차 단맛에 집착한다. 가짜 젖꼭지에 설탕을 조금 묻히면 아기는 더 길고 더 세게 빤다. 아이가 울 때 단 물을 한 방울 주면 심장 박동이 느려지고, 얼굴은 편해지고, 뇌 활동은 쾌락적인 패턴을 그린다. 설탕은 어린 뇌에서조차 마취제를 끄집어내는 것이다

사람 머릿속에는 매일매일 수십만 개의 화학적 도서관이 지어진다. 그 도서관은 모든 것을 수용체에 보내 결과를 떠맡긴다. 혀는 미각의 전기 시스템처럼 잘 구분되는 선들로 만들어졌다. 미뢰는 수십 개의 세포 덩어리들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미각 세포와 수용체가 기능하는 방법은 생물학자들의 상상보다 훨씬 간단해 보인다.

동물의 왕국은 세상을 이원적 선택으로 나눈다. 단것과 쓴 것. 뭔가를 달게 느끼는 것은 맛 자체가 아니라 맛있다는 신호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쓴맛은 맛 없다는 메시지를 보내는 거고. 그것이야말로 모방될 수 없는 설탕의 효능 아닌가. 혀는 좋고 나쁨을 따진다. 우리는 다 진보적인 감각론자니까. 이때 단맛과 쓴맛은 다른 작용을 촉발한다. 단맛은 칼로리 함유량을 결정한다. 쓴맛은 독소에 대해 경고한다. 삶과 죽음의 차이처럼. 인간이 쓴 것보다 단것을 선호하도록 프로그래밍되었다는 사실은 진화의 분명한 장점을 보여준다. 다윈식 진화의 확실한 예시랄까. 그런데 왜 같은 세포가 두 개의 신호를 보낼까? 단맛을 암호화하고 해독하는 신호는 어떤 것일까? 혹시 각각의 세포는 단맛이라는 단일한 주파수에만 맞춰져 있는 건 아닐까?

어렸을 때 엄마는 말했다. 채소 먹어. 그래야 튼튼해져. 불량 식품 사 먹지 마. 키가 안 커. 세월이 흘러 나는 엄마에게 말한다. 흰 빵 너무 많이 먹지 마. 흰 쌀이나 흰 밀가루 같은 정제 탄수화물은 혈액 속에 포도당을 넘치게 한대. 설탕은 절대로 안 돼. 많이 먹으면 일찍 죽는대.

엄마로부터 설탕을 떼어놓는 매일의 해프닝은 우리를 일촉즉발의 불쌍한 영혼들로 만들었다. 어쩌면 우리 집 아침 풍경은 가족 식사가 만드는 시대적 가정사를 다룬 드라마인지도 몰랐다. <퍼블릭 에너미>에서 제임스 캐그니가, 아침 음료로 맥주를 시킨 자기에게 딴지를 건 매 클라크 면전에서 포도를 으깨버린 장면하곤 사뭇 다를지라도. 그러나 니컬러스 레이 감독의 <실물보다 큰>에서 아들이 우유를 엎질렀을 때 제임스 메이슨이 보이는 분노는 식탁이 사랑이 아니라 공포로 가득한 곳이란 걸 완전히 일깨우고 말았지.

우리가 인생의 끄트머리에 브로콜리보다 사탕을 더 좋아하는 것은 생존보다 추억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의 사춘기는 출장 갔던 아버지가 건네주던 초콜릿으로 요약될 것이다. 초콜릿의 단맛은 관계의 정수였달까. 가족끼리 식사한 추억이 없는 이의 감정적인 애착은 혹시 정크 푸드 주위를 맴돌지 않을까. 프루스트가 요새도 글을 쓴다면 그의 감각적 몽상의 촉매제는 틀림없이 아작아작 씹어먹는 크런치 바일 것이다.

미뢰는 속삭인다. 세상에 설탕보다 맛있는 것은 없다고, 그렇지만 설탕보다 나은 것이 있다는 것을 알기 위해 인생을 더 배워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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