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재 8일째 이어지며 정부 비난 여론 확산
"대통령 전용기 13대 있는데 소방기는 없어"
경제난, 코로나 이어 에르도안 행보에 부담
터키 남부에서 발생한 대형 산불이 8일째 계속되면서 정부의 지지부진한 진압과 무능을 비난하는 여론이 커지고 있다. 정치권 내에서도 책임 공방이 이어지는 가운데, 화마(火魔)가 권위주의 통치자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의 입지를 뒤흔들 수 있다는 전망마저 나온다. 산불이 정치 영역으로까지 옮겨 붙는 형국이다.
4일(현지시간)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 등 외신에 따르면, 지난달 28일 터키 남서부 안탈리아주(州)에서 시작된 대규모 산불의 기세는 지금도 꺾이지 않고 있다. 불길은 강한 바람과 건조한 날씨 탓에 인근 지역으로 급속히 번지면서 이날 에게해 연안도시 밀라스의 석탄 화력발전소마저 덮쳤다. 주정부가 주민들을 대피시키고 수소탱크를 미리 비웠지만, 수천 톤의 석탄에 불씨가 옮겨 붙으면서 통제 불능 상태에도 이르고 있다. 이날까지 소방관 두 명을 비롯해 8명이 목숨을 잃었다. 술레이만 소일루 터키 내무장관은 “28개 지역에서 3,219가구, 1만6,603명이 화재 때문에 대피했다”고 밝혔다.
좀체 잡히지 않는 불길 만큼이나 터키인을 힘들게 하는 건 정부의 미흡한 대응이다. 사실 이번 산불은 기후변화에 따른 기록적 폭염과 강풍의 영향이 크다. 북아프리카에서 불어 온 뜨거운 공기가 일으킨 산불로 터키뿐 아니라 그리스 등 남부 유럽 국가들도 연일 고전 중이다. 화재를 오로지 정부 탓으로 돌리긴 어렵다.
그러나 당국의 대처가 천재(天災)를 인재(人災)로 만들었다는 게 터키인들의 생각이다. 실제 화재 이후 정부의 무능과 헛발질은 연일 수면 위로 드러나고 있다. 터키 전문가 아슬리 아이딘타스바스 유럽외교위원회 선임연구원은 미 일간 워싱턴포스트에 “그리스가 소방용 비행기 39대를 보유한 것과 달리, 터키는 단 한 대도 없다”며 “반면 에르도안 대통령의 전용기는 13대”라고 꼬집었다. 화재 초기 터키와 불편한 관계인 이스라엘과 서방 국가들마저 지원 의사를 타진했지만, 에르도안 정부가 “상황이 통제되고 있다”며 거절했다는 보도(AP통신)도 나왔다.
삶의 터전을 한순간에 잃은 사람들은 좌절만 겪고 있다. 아무런 정부 도움도 받지 못한 탓에 상실감은 두 배 이상이다. 무글라주 보잘란 마을 주민 네브자트 일디림(30)은 “당국에 전화해 도움을 요청했으나 아무것도 오지 않았다. 결국 혼자서 스스로를 보호해야만 했다”고 AP통신에 말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보다 못한 주민들은 가정용 양동이부터 시멘트 믹서까지, 가능한 곳 모두에 물을 채워 불 끄기에 나서고 있다”고 전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엔 ‘터키를 도와달라’는 호소는 물론, 에르도안 대통령의 무능을 질타하는 글도 끊이지 않는다. 트위터상에선 “집 앞까지 불길이 번졌음에도 근처엔 소방차가 한 대도 없다. 양심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면 (대통령은) 사직해야 한다”고 촉구하는 한 터키인의 영상이 급속히 퍼지고 있다.
급기야 논란은 정치권으로 확산됐다. 터키 제1야당인 공화인민당(CHP)의 케말 클르츠다로을루 대표는 “에르도안은 산불 진압에 실패했다. 그는 사태에 대한 기본 계획도 부족하고 지구온난화 경고도 무시하고 있다”고 일갈했다. 제2야당인 국민민주당(HDP) 새루한 올룩 의원도 “소방용 항공기 보유를 포함해 (산불) 준비가 부족했던 데다, 정부 부주의까지 겹치며 이번 재난 규모가 커졌다”고 힘을 보탰다.
반면 친(親)정부 인사들은 야당이 정치적 이익을 위해 산불을 정쟁의 도구로 삼는다고 맞섰다. 에르도안 대통령 역시 “산불이 번지는 상황에서 정치가 개입하면 안 된다”며 야당에 분노를 표출했다. 터키 당국은 화재 책임을 덮어 씌우려는 희생양 찾기에도 나섰다. 자국 내 쿠르드족 분리주의 무장정파인 쿠르드노동자당(PKK)의 고의 방화 의혹마저 제기했다. 반정부 단체가 사보타주(의도적 파괴행위)를 했다는 의미다.
어쨌든 이번 사태는 ‘21세기 술탄’을 꿈꾸며 권위주의 통치를 강화하는 에르도안 대통령의 앞날엔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NYT는 “고질적 경제난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에 이어, 대형 산불까지 겹치면서 에르도안이 정치적 위기에 내몰렸다”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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