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세기 영국의 시를 영화화... 5일 개봉
아서 왕과 원탁의 기사들, 영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나무인간 그루트를 닮은 거구의 녹색 기사, 그리고 판타지 소설 ‘반지의 제왕’과 ‘호빗’을 쓴 J. R. R. 톨킨.
5일 개봉한 ‘그린 나이트’는 블록버스터 판타지 액션 영화를 연상시키는 요소들을 가볍게 배반하며 한 편의 서사시를 낭송하듯 알쏭달쏭한 이야기를 펼친다. 14세기 영국에서 쓰인 작자 미상의 2,500행 두운시(두운법으로 쓰인 시) ‘가웨인 경과 녹색의 기사’를 1925년 톨킨이 최초로 현대어로 해석한 번역본이 영화의 원작이다. 이 시는 켈트 신화에서 영향받은 수수께끼 같은 기사도 이야기에 풍성한 상징과 은유를 담은 데다 다분히 현대적인 주제를 담고 있어 영문학사에서 특별한 대접을 받는다.
영화의 플롯은 단순하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연회를 연 아서왕과 원탁의 기사들 앞에 나무 형상의 녹색 기사가 나타나 내기를 제안한다. 도끼로 자신의 목을 내리치면 명예와 재물을 차지할 수 있다는 것. 단 1년 뒤 녹색 예배당으로 찾아와 녹색 기사의 도끼 앞에 목을 내밀어야 한다.
황당한 내기에 서로 눈치만 보는 사이 아직 기사가 되지 못한, 아서왕의 조카 가웨인이 내기에 응한다. “무용담 하나 없이 기사들과 어울려선 안 된다”는 기네비어 왕비의 말에 자극받은 그는 단칼에 녹색 기사의 목을 자르고, 잘린 머리를 들고 유유히 떠난 녹색 기사와 1년 뒤 재회해야 하는 운명에 처한다.
어느덧 1년이 지나 가웨인은 죽음을 무릅쓰고 녹색 기사를 찾아 나선다. 명예를 지키기 위한 여정에서 그는 여러 차례 자신의 기사도를 시험하는 관문을 거친다. 그중에서도 핵심은 버틸락성(城)에서 성주와 하는 ‘획득물 교환 게임’. 성에 머무는 동안 성주가 사냥해 온 것들과 자신이 성 안에서 얻은 것을 교환하는 것인데, 여기에 성주 아내의 유혹까지 끼어들며 그의 기사도를 시험한다.
목 베기 게임으로 시작한 영화는 획득물 교환 게임을 거쳐 마지막 목 베기 게임으로 끝난다. 패기 넘치는 영웅으로 출발한 주인공은 충성심과 용맹함, 신의, 여성에 대한 정중함과 순결, 독실한 종교적 믿음 등 기사도에서 중요한 덕목들을 지켜내지 못하는 자신의 한계를 발견한다. 감독은 실패한 영웅을 다루며 은근히 기사도의 허상을 꼬집는다. 세속적 욕망에 매몰된 어리석은 남성과 자기 주도적이고 영리한 여성을 대비시킨 지점도 인상적이다.
영화 ‘고스트 스토리’(2017)로 깊은 인상을 남겼던 데이비드 로워리 감독은 도적들, 목을 베인 귀신, 산처럼 큰 거인족, 말하는 여우 등의 캐릭터나 마지막 목 베기 게임 이후 가웨인의 이야기 같은 원작에 없는 설정을 더해 보다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오락성이 높은 영화와는 거리가 멀다. 극적인 플롯을 기대하는 관객에겐 난해하고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인내심을 갖고 작품 속 상징과 은유, 풍유를 천천히 곱씹다 보면 텍스트가 보이는 것보다 훨씬 풍성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시각적 즐거움도 빼놓을 수 없다.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화면 연출은 움직이는 미술 작품을 연상시킬 만큼 매혹적이다. 영화 '호빗' '아바타’ '킹콩'의 시각효과를 연출한 웨타 디지털의 기술력이 적잖은 역할을 했다. 피부색의 한계를 넘어 영국인 가웨인을 연기한 인도계 영국 배우 데브 파텔의 섬세한 연기도 주목할 만하다. 상영시간 129분. 15세 이상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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