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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돋보이지 않아도 어디든 존재하는 이끼 같은 검사가 많아져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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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돋보이지 않아도 어디든 존재하는 이끼 같은 검사가 많아져야죠"

입력
2021.07.21 04:30
수정
2021.07.21 08:52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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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나의 민원인' 출간 정명원 검사
초임 땐 민원인 무서웠지만
그들이 지금의 날 만들어줘
국민참여재판 검사로 새 길
음지서도 의미있는 일 가능
"인사 때면 다들 특수검사만 희망
존재감 없는 검사도 중요한 역할"

정명원 대구지검 서부지청 부부장검사가 지난 19일 한국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대구=이상무 기자

정명원 대구지검 서부지청 부부장검사가 지난 19일 한국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대구=이상무 기자

통상 ‘민원인’은 성가신 존재로 여겨진다. 분명 억울한 게 있어 어려운 걸음까지 하게 된 건데, 검찰이나 경찰 등 수사기관 입장에선 웃는 얼굴로 맞이하기가 여간 쉽지가 않다.

그런데 이런 민원인을 ‘친애한다’고 고백한 검사가 등장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나의 민원인’이라는 양념까지 추가해 친숙함을 높였다. 또 한 명의 ‘별종(別種)’ 검사가 나온 것인가. 한국일보가 19일 ‘친애하는 나의 민원인’이란 책을 출간한 정명원(43·사법연수원 35기) 대구지검 서부지청 검사를 19일 청사에서 만났다.

"책 이름 잘못 지은 거 같아요. 저희 검사실로 민원인들 다 오면 어떻게 해요."

정 검사는 출간 소감을 묻는 질문에 대뜸 주변 직원들의 푸념부터 들려줬다. 검찰청 건물에 꿋꿋하게 나타나는 민원인들이 많은데, 심지어 친애한다고 해놨으니 얼마나 더 찾아오겠냐는 걱정을 전해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올해로 검사 생활 16년 차인 정 검사는 이런 걱정이 아무렇지 않은 듯 웃음을 보였다.

"초임검사 시절엔 '왜 이걸 못 하냐'고 따져 묻는 민원인들에게 욕먹는 게 싫었는데, 이젠 민원인들이 덜 무서워요. 민원인들이 지금의 나를 만든 거죠." 정 검사가 말하는 '지금의 그'는 어떤 모습일까.

기소보다 불기소가 마음 편한 검사

정명원 대구지검 서부지청 부부장검사가 쓴 '친애하는 나의 민원인'. 한겨레출판 제공

정명원 대구지검 서부지청 부부장검사가 쓴 '친애하는 나의 민원인'. 한겨레출판 제공

정 검사는 '기소'가 무서웠다고 털어놨다. 의사가 수술을 무서워하고, 판사가 재판을 무섭다고 하는 격이었다. 애초 검사가 적성에 맞지 않았던 걸까. 정 검사는 시원하게 인정했다. "기질이 검사와 맞지 않아서 고민을 많이 했어요. 사건에 대한 호기심이 남들보다 많지도 않고, 다른 사람 인생에 끼어드는 것도 힘들었죠."

고민하던 정 검사는 어느 날 이런 말을 들었다고 했다. '판사를 하면 기소된 사람들만 만나고, 변호사가 되면 돈 가지고 온 사람들 얘기만 듣는데, 검사가 되면 누구든지 만날 수가 있다.' 여기서 정 검사는 민원인들을 떠올렸다고 한다. "검사가 처리할 수 없는 사건을 가지고 온 민원인들에게 기소 잘하는 검사가 필요할까요. 불기소 잘하는 나 같은 검사도 그 사람들에겐 소중한 검사일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정 검사는 이렇게 진로를 바꿀 뻔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파편 같은 증거를 모아 배심원에게 '그림'을 선사하다

당시 '상주 농약사이다 살인사건' 피고인이었던 박모 할머니가 2015년 12월 7일 오후 국민참여재판에 출석하기 위해 대구지법으로 향하는 모습. 대구=연합뉴스

당시 '상주 농약사이다 살인사건' 피고인이었던 박모 할머니가 2015년 12월 7일 오후 국민참여재판에 출석하기 위해 대구지법으로 향하는 모습. 대구=연합뉴스

그렇게 마음 먹은 정 검사에게 복덩이처럼 다가온 게 '국민참여재판'이었다. 검사 생활 10년 차 때였다. 국민참여재판은 배심원들이 형사재판에 참여해 유무죄 평결을 내리는 제도다. 배심원들 평결은 법적 구속력이 없지만 판사 결정에 중요한 잣대가 되고 있다. 그는 배심원들에게 파편들을 모아 하나의 그림을 만들어 주는 역할에 푹 빠지기 시작했다. 정 검사는 "일반 공판에선 증거들을 내면 조합하는 건 판사 몫이었다"며 "국민참여재판에선 증거가 가진 의미를 배심원들이 잘 모르기 때문에, 각각의 증거를 어떻게 읽어야 할지 도와줘야 했다"고 말했다.

정 검사에게 할머니 2명을 사망에 이르게 하고 4명을 중태에 빠지게 한 '상주 농약사이다 사건'은 지금도 잊지 못할 경험이다. 정 검사가 '본인 같은 검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비로소 확인한 재판이기 때문이다.

그는 "박 할머니 옷, 지팡이, 전동차에 묻어 있는 농약 성분 등 수많은 간접 증거를 차곡차곡 수집하고, 이 증거들이 결국 박 할머니가 사이다에 농약을 탔다는 사실을 가리키고 있다는 점을 배심원들에게 하나하나 설명했다"고 말했다. 유무죄의 갈림길에서 박 할머니가 사이다에 농약을 탔다는 직접 증거는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정 검사의 설득이 통했는지 배심원 7명은 만장일치로 박 할머니의 유죄를 결정했다.

"이끼가 숲에서 얼마나 중요한 지 인정 받고 싶다"

정명원 대구지검 서부지청 부부장검사가 지난 19일 한국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대구=이상무 기자

정명원 대구지검 서부지청 부부장검사가 지난 19일 한국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대구=이상무 기자

이런 경험은 정 검사에게 새로운 길을 안내했다. 이른바 '엘리트 코스'인 특수검사의 길도, 공안검사의 길도 아니었다. 과거엔 찾아볼 수 없었던 국민참여재판 전문 검사가 된 것이다. 국민참여재판 분야에서 공인전문검사 2급 인증 블루벨트를 대검에서 받은 유일한 검사, 그게 정 검사였다.

“검찰 조직엔 하나의 정답이 있어요. 모두들 덕담으로 '이번에 잘하면 특수부(현 반부패강력수사부) 가야지'라고 말하죠. '이번에 공판부 갈 건가' 말하면 실례되는 분위기죠. 형사부나 공판부는 검찰 내에 항상 있었는데 없는 존재로 취급 받았잖아요. 저를 통해서 이곳에서도 검사로서 의미 있게 일할 수 있다는 점을 알았으면 좋겠어요.”

정 검사는 그런 자신을 ‘이끼’에 빗댔다. 존재하는 줄 몰랐지만 항상 어디든 존재하는 '이끼 같은 검사'가 그의 지금이자 미래라는 설명이다. 여기서 정 검사는 약간의 소망을 덧붙였다.

“저는 이끼에서 나무가 되고 싶지 않아요. 단지 이끼가 숲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인정받고 싶어요. 이렇게 이끼로 인정받는 검사가 늘어나다 보면 기존 질서가 희석되고, 검찰 조직도 훨씬 풍부해지지 않을까요.” 본인과 동료, 검찰 조직 전체에 대한 바람이었다.

대구= 이상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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