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 21일부터
기증받은 '이건희 컬렉션' 대대적 공개 전시
고 이건희 삼성전자 그룹 회장과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장은 부부의 첫 컬렉션으로 겸재 정선(1676~1759)의 ‘인왕제색도(국보 제216호)’를 택했다. 그도 그럴 것이 비 온 뒤 구름이 걷혀 가는 인왕산의 모습을 담은 인왕제색도는, 정선이 그린 진경 산수화 중에서 으뜸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내리다 그치는 비처럼, 정선은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던 친구 이병연이 빨리 낫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이 그림을 그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정선은 매일 산에 오르며 인왕산을 눈에 담았고, 그 구석구석을 자신감 있게 표현했다. 이수경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은 “인왕산은 당시 명승지가 아니었는데, 이를 멋지게 그려냈다. 바위 등 모든 요소가 다 살아 있다”며 “늘 보던 동네 뒷산에 대한 애정이 담긴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국립경주박물관장을 지낸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도 “비가 오다 개면 산 모양이 새롭게 보이는데, 그걸 포착한 그림”이라며 “필치가 힘차고 구도도 좋은 걸작”이라고 평가했다.
국가에 기증된 ‘이건희 컬렉션’이 21일부터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대대적으로 공개된다. 기증품 중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인왕제색도를 비롯해 총 77점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된다.
인왕제색도 옆에는 단원 김홍도(1745~1806년 이후)가 말년에 그린 ‘추성부도(보물 제1393호)’가 놓여 있다. 이 그림은 김홍도가 1805년에 그린 것으로 그의 그림 중 연도가 확인되는 마지막 작품이다. 이재호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중국 북송의 문인 구양수가 쓴 추성부라는 시를 그림으로 그려낸 것”이라며 “60대 초반까지 산 것으로 추정되는 김홍도가 61세에 죽음을 예감하며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고려 불화로 현존하는 유일의 ‘천수관음보살도(보물 제2015호)’도 감상할 수 있다. 무수히 많은 손과 눈으로 중생을 구원한다는 천수관음보살 신앙은 삼국유사에 확인될 정도로 역사가 깊지만, 그림으로 전하는 것은 이 작품이 유일하다는 설명이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는 적외선과 X선 촬영 사진이 제공돼, 육안으로는 확인하기 힘든 부분까지 볼 수 있다. 천수관음보살의 여러 손 모양과 광배(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성스러운 빛을 형상화한 것)에 그려진 여러 개의 눈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밖에도 다양한 국보와 보물들이 전시돼 있다. 삼국시대 금동불의 섬세함을 보여주는 높이 8.8㎝의 일광삼존상(국보 제134호), 고려 태조 어진을 모신 봉업사에서 제작된 향로(보물 제1414호), 고려 무관들이 장수와 승진을 기원하며 제작해 경선사에 바친 청동북(보물 제2008호) 등이다.
최응천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이사장(동국대 미술사학과 교수)은 “일광삼존상은 완벽한 게 10점이 채 안 남아 있는데, 이 작품은 명문은 없지만 상태가 좋다. 고대 불교 조각 연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 유물”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봉업사’가 새겨진 향로는 3족짜리 향로 중 가장 큰 것이며, ‘경선사’가 새겨진 청동북은 앞뒤가 막히고 옆에 소리를 내는 구멍이 뚫린 쇠북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모두 보물로 지정될 만큼 가치가 큰 것”이라고 덧붙였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한국미술 명작 58점을 볼 수 있다. 입구엔 이상범의 무릉도원(1922년)과 백남순의 낙원(1936년)이 마주 보게 전시돼 있다. 동양의 이상향과 서구식 이상향이 조응하는 모습으로, 이상향에 대한 동경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의 주제였음을 알 수 있게 한다.
‘국민화가’ 방으로 불리는 공간에는 박수근, 장욱진, 김환기, 유영국, 이중섭 등 한국인이 사랑하는 거장들의 주요 작품이 기다린다. 먼저 김환기의 ‘여인들과 항아리’는 시선을 사로잡는다. 가로 6m에 달하는 대형작이다. 이 작품은 김환기가 그린 그림 중 가장 큰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1950년대 조선방직을 인수한 삼호그룹의 정재호 회장이 퇴계로에 자택을 신축하면서 대형 벽화용으로 주문해 제작된 것이다. 그림은 1960년대 말 삼호그룹이 쇠락하면서 미술시장에 나와 이후 이건희 컬렉션으로 소장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벽면을 가득 메운 화면에는 항아리를 이거나 안은 반라의 여인들, 백자 항아리, 학, 새장, 사슴 등 김환기가 즐겨 사용했던 소재가 모여 있다. 박미화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관은 “달항아리를 무척이나 사랑한 김환기는 집에 놓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모았다”며 “작품에 나오는 비대칭의 자연스러운 선들은 달항아리와 연관이 깊다”고 설명했다.
이중섭이 1950년대에 그린 '황소'도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붉은 황소 머리를 그린 것인데, 현존하는 총 4점 중 하나다. 이중섭은 전쟁이 끝나고 모든 것을 새롭게 출발해야 하는 시점에 강렬한 붉은 황소를 본격적으로 그렸다. 붉은 황소 옆에는 '흰 소'도 있다. 황소 머리에 집중한 작품과 달리 이 그림은 흰 소의 전신을 담고 있다.
미술사학자인 이주은 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는 미술관에 전시된 이건희 컬렉션 중에서도 우리나라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불리는 유영국의 작품을 추천했다. 1972년과 1974년에 제작된 산을 소재로 한, 원색이 두드러지는 그림들이다. 이주은 교수는 “유영국은 변함없이 절대적인 어떤 것을 기준으로 삼아 살고 싶었고, 또 그것을 화면에 담고 싶어 했기 때문에 사람 대신 항상 그 자리에 있는 산을 그려 왔다”며 “세련된 색감에 한 번 놀라고, 그 색채가 뿜어내는 엄청난 에너지에 또 한번 놀라게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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