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WP 등 세계 언론 17곳 공동 취재후 보도
'피살 언론인' 카슈끄지 관계자도 사찰 대상
'페가수스' 프로그램 침투한 전화번호 5만개
신원 확인된 휴대폰 주인 50개국·1000여명
제조사 "테러방지용 개발" 범죄연루 의혹 부인
이스라엘 민간 보안업체가 만든 스파이웨어(해킹용 프로그램)가 전 세계 언론인과 정치인, 반(反)정부 인사 등의 휴대폰을 전방위 감시하는 데 쓰였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테러 방지용’이라는 개발사 주장과 달리, 권위주의 국가에서 눈엣가시 인사를 억압 또는 감시하거나, 민간인 사찰을 하는 목적으로 악용됐다고 의심할 만한 정황도 드러났다. 특히 사찰 대상엔 2018년 살해된 사우디아라비아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의 주변인도 포함됐다.
정치인·공직자·기업인 등 전방위 감시했나
미국 일간 워싱턴포스트(WP)는 18일(현지시간) 이스라엘 보안기업 NSO그룹이 개발해 정부 승인을 받은 스파이웨어 ‘페가수스’가 세계 각국 유력 인사들의 휴대폰 해킹을 시도했다고 보도했다. 스파이웨어는 휴대폰 이용자가 함정 링크를 누르면 중요 개인 정보가 유출되도록 하는 악성 프로그램이다. 페가수스는 침투한 휴대폰의 통화나 문자메시지는 물론, 위치정보와 연락처, 이메일, 일정, 인터넷 검색 기록 등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수 있어 지금까지 개발된 프로그램 중 가장 강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심지어 휴대폰에 내장된 마이크와 카메라도 제어할 수 있다.
인권단체 국제엠네스티와 프랑스 비영리 언론단체 ‘포비든 스토리즈’는 이 프로그램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는 전화번호 5만 개를 입수했다. 모두 2016년 이후 수집된 번호들이다. 두 단체는 WP와 영국 가디언, 프랑스 르몽드 등 언론사 17곳과 이를 공유했고, 해당 언론사들은 공동취재팀을 꾸려 수개월간 확인 작업을 벌였다. 그 결과, 세계 각국 정치인과 공직자, 언론인, 기업인 등이 페가수스의 표적이 된 것으로 나타났다.
현재까지 신원이 확인된 전화번호 주인공은 50개 국의 1,000여 명이다. 일부 국가 정상과 총리 등 정치인 및 정부 관계자 600여 명, 미 CNN방송·일간 월스트리트저널(WSJ)·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카타르 알자지라방송 등의 기자 189명, 인권운동가 85명, 기업 임원 65명이 포함됐다. NSO는 “테러범과 중범죄자 추적을 위해 페가수스를 개발했다”고 했으나, ‘불법 감시 프로그램’으로 악용된 셈이다.
"비판적 언론 위협 도구로 사용" 지적
물론 이들 모두가 해킹 피해를 입었는지는 불분명하다. 하지만 ‘반정부 인사 관련 정보 수집’에 활용됐다고 볼 만한 사례가 있었다는 점은 예사롭지 않다. 사우디 반체제 언론인으로 활동하다 2018년 10월 터키 이스탄불에서 자국 요원들한테 무참히 살해된 카슈끄지 사건이 대표적이다. 이번 조사 과정에선 그의 약혼녀 하티제 젠기스, 암살 조사에 관여한 터키 관리 두 명의 휴대폰이 암살 사건 발생 직후 페가수스에 감염된 사실이 밝혀졌다. 카슈끄지의 전 부인 하난 엘라트르의 휴대폰도 암살 사건 이전인 2017년 11월~2018년 4월 해킹의 표적이 됐으나, 이 기기가 실제 감염됐는지는 결론 내지 못했다고 WP는 설명했다.
2017년 사우디 정부가 NSO그룹으로부터 페가수스를 5,500만 달러에 구매했다는 이스라엘 현지 언론 보도도 나왔다. 사실일 경우, 이스라엘과 사우디의 오랜 대립 관계에 비춰 보면 대단히 이례적인 거래다. 사우디 왕실이 ‘앙숙’의 손을 잡으면서까지 평소 눈엣가시였던 카슈끄지를 감시하거나, 암살 사건 처리 과정을 파악하려 했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미국 정보당국은 카슈끄지 살해 배후에 무함마드 빈살만 사우디 왕세자가 있다는 결론을 내린 상태다.
멕시코 프리랜서 기자 세실리오 피네다 비르토도 페가수스 감시 대상 목록에 올랐다. 그는 휴대폰 번호가 페가수스에 수집된 지 한 달 만인 2017년 3월 피살됐다. 아랍에미리트연합(UAE) 왕족의 호화 요트 구매 의혹을 취재한 WSJ 기자 등도 명단에 포함돼 있었다. WP는 “기자들의 경우, 대부분 정부 비판 기사를 쓰거나 고위층 부패 의혹을 추적해 온 이들”이라고 전했다.
페가수스가 전화번호를 수집한 이들의 국적을 따져 보면, 사우디와 멕시코, 인도, UAE, 카타르 등이 많았다. 주로 권위주의 정권이 들어선 국가들이 이 프로그램을 활용해 언론인이나 반체제 인사를 감시했을 것이라는 추정이 나온다. 만약 이 같은 의혹이 사실로 드러날 경우, 스파이웨어를 판매한 이스라엘뿐 아니라 구입한 국가들까지 지탄을 받는 등 국제 문제로 비화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아그네스 캘러마드 국제엠네스티 사무총장은 “페가수스가 어떻게 비판적 언론을 위협하는 도구로 사용되는지를 생생히 보여준다”며 “이것은 대중의 이야기를 통제하고, 조사에 저항하고, 반대하는 목소리를 억제하려 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NSO 측은 이번 보도 내용에 잘못된 추정과 사실적 오류가 포함됐다면서도 “모든 가능성을 조사하고 사실이 밝혀지면 강력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밝혔다. 다만 암살 사건 연루 의혹에 대해선 “우리의 기술은 카슈끄지나 그의 가족에 관한 정보를 듣고, 모니터링하고, 추적하거나 수집하는 데 사용되지 않았다”며 선을 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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