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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가 된 매춘부

입력
2021.07.15 17:00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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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지
김선지작가

비잔틴제국 테오도라 황후는 성녀인가 악녀인가


장 조제프 벵자맹 콩스탕, ‘콜로세움의 황후 테오도라’, 1889년

장 조제프 벵자맹 콩스탕, ‘콜로세움의 황후 테오도라’, 1889년


신데렐라는 동화 속에만 있는 게 아니다. 동서고금의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고 우리 주변에도 가끔 존재한다. 고려시대 공녀로 끌려가 원나라 황비가 된 기황후, 폴란드 출신 노예로 오스만 제국의 술탄 슐레이만 1세의 황후가 된 록셀라나 등 아득한 옛날 신데렐라부터 빈민층 출신 여배우에서 아르헨티나의 퍼스트레이디가 된 에바 페론 같은 현대의 신데렐라까지. 그중에서도 비잔틴 제국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황후 테오도라는 단연 초특급 신데렐라다.

위 그림은 19세기 프랑스 화가 장 조제프 벵자맹 콩스탕이 그린 테오도라다. 그녀는 오리엔탈풍의 이국적이고 호화로운 보석과 드레스로 우아하게 차리고, 왕족 전용 좌석에 편안한 자세로 기대어 앉아 원형 경기장을 유유히 내려다보고 있다. 눈을 살짝 내리깔고 입을 야무지게 다문 다소 거만한 표정은 그녀가 위엄과 권력이 있는 여왕임을 보여준다.

테오도라를 묘사한 가장 유명한 미술작품은 이탈리아 라벤나의 산 비탈레 성당 모자이크다. 색색의 테세라(tessera: 모자이크 세공에 쓰이는 돌, 유리, 세라믹 등의 작은 조각)의 조화로운 배치가 절묘한 모자이크에 성당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이 반사되어 더할 나위 없이 화려하고 신비로운 모습을 드러낸다. 제단 벽에는 그리스도가 천구 위에 앉아 천사들의 보좌를 받고 있고, 그 아래 양쪽에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테오도라 황후의 모자이크화가 있다. 왕족의 위상을 나타내는 자주색 망토를 입은 채 주교들과 장군들을 거느린 황제가 빵이 든 성반을 들고 그리스도가 있는 제단 벽을 향하고 있다. 역시 자주색 로브를 걸친 테오도라는 측근에 둘러싸여 성찬용 포도주 잔을 제단으로 옮긴다. 유스티니아누스 맞은편에 묘사된 테오도라의 초상화는 그녀가 황제와 동등한 정치적, 종교적 위상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테오도라 황후와 시녀들(산 비탈레 성당 모자이크), 548년경

테오도라 황후와 시녀들(산 비탈레 성당 모자이크), 548년경


미술작품들에서 이토록 장엄하고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표현된 테오도라는 누구인가? 그녀는 콘스탄티노플의 히포드롬의 곰 조련사 아버지와 댄서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히포드롬은 전차 경기, 검투사들의 싸움, 연극, 서커스를 진행했던 공연장이었다. 테오도라는 여기서 음란한 스트립쇼와 마임 연기, 코미디를 하는 여배우로 일했는데, 당시 여배우란 상류층을 위한 매춘부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국부에 보리 이삭을 흩어놓고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를 암시하는 거위에게 쪼아 먹게 하는 음탕한 쇼 ‘레다와 백조’에서 레다를 연기해 인기를 끌었다.

테오도라의 인생 역전 드라마는 황제의 조카이자 원로원 의원인 유스티니아누스와의 만남으로부터 시작된다. 테오도라는 길고 검은 머리카락, 아몬드 모양의 커다란 눈, 올리브색 피부, 작은 키에 창백한 얼굴, 강렬한 눈빛을 가진 매혹적인 여성이었다. 그녀에게 완전히 넋을 잃은 유스티니아누스는 귀족이 무희, 여배우 같은 천민과 결혼할 수 없는 법을 개정하면서까지 테오도라와 결혼했다. 그가 527년 황제로 즉위함에 따라 테오도라는 황후가 되었다. 사람들은 하층계급 출신의 매춘부가 비잔틴 제국의 황후가 되었다고 조롱했지만, 테오도라는 단순한 신데렐라가 아니었다.

역사학자들에 의하면, 테오도라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통치 배후에 있던 브레인이었다. 그녀는 황제가 로마제국의 옛 영토를 되찾는 정복사업을 벌여 동로마의 영토를 확장하고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을 편찬하도록 보좌했다. 심지어 유스티니아누스는 그녀를 공동 황제로 대우했다. 이 놀라운 여성은 남녀평등에 대한 신념이 확고했고, 특히 여성의 인권 신장에 주력했다. 어린 소녀들의 인신매매와 강제 매춘 사업을 하는 포주를 엄벌하는 법을 제정했다. 성매매업소를 폐쇄하고 성노동 여성들의 쉼터를 마련했으며 강간을 사형으로 처벌했다. 이혼법을 개정해 이혼 및 재산 소유권에 대한 여성의 권리를 확대했다. 그녀는 비잔틴 제국의 가부장적, 여성 혐오적 체제에서 사회적 약자인 여성에게 손을 내밀었던 중세의 페미니스트였다. 이런 여러 업적 때문에 동방정교회에서는 테오도라를 성녀로 추앙한다.

한편, 테오도라가 잔인하고 표독스러웠다는 설도 있다. 매춘부 출신이라는 자격지심 때문에 자신을 비판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이들을 무자비하게 고문하고 처형했다. 6세기 비잔틴 제국의 역사가 프로코피우스는 그의 책 '비사'에서 그녀가 몸을 파는 매춘부로, 미모와 재치로 많은 남자를 유혹했으며 낙태도 여러 번 했고 명문가 출신의 관리와 동거했다가 버림받았다는 등 과거의 치부를 낱낱이 기록했다. 또한 황후가 화류계 출신답게 쾌락에 빠져 산 요부였고, 정치적으로는 권력욕이 강하고 권모술수에 능한 여자였다고 혹평했다.

그녀는 성녀였을까, 아니면 천한 신분에 대한 열등감으로 권력과 명예를 추구한 욕망의 화신이었을까? 현대판 테오도라에 가장 가까운 인물은 아마도 에바 페론일 것이다. 그녀는 노동자 및 하층민들에게 후한 정책과 여성 인권 운동으로 인해 성녀로 떠받들어지는 한편, 출세를 위해 성을 무기로 수많은 남자를 이용한 매춘부, 또는 아르헨티나를 망친 포퓰리즘의 대명사로 비난받기도 한다. 실제로 에바 페론은 지나치게 사치스러운 생활, 그리스 선박왕 오나시스와의 추문 등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었다.

인간은 모두 자신의 내부에 모순을 안고 산다. 역사 속 인물 테오도라나 에바 페론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 두 사람도 성녀와 악녀, 선과 악, 그 중간 어디쯤에 자리 잡고 있지 않을까?

김선지 작가·'그림 속 천문학' '싸우는 여성들의 미술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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