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원 장편소설 '불펜의 시간'
모든 스포츠가 인생과 조금씩 닮아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야구는 많은 요소가 마치 인생의 비유 같다. 홈을 떠나 다시 홈으로 돌아오기까지의 여정, 9회말 2아웃까지는 절대 알 수 없는 승패, 그리고 마지막 홈런과 같은 한방의 역전 기회. ‘각본 없는 한 편의 드라마’라는 수식이 붙는 이유이자, 유독 야구를 소재로 삼은 스포츠 서사가 많은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제26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이자 최근 출간된 김유원 작가의 ‘불펜의 시간’ 역시 이 같은 야구 서사의 한 자리를 꿰찰 작품이다. 공교롭게도 2003년 제8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인 박민규 작가의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 이어 또 한번 야구를 소재로 한 작품이 해당 상의 주인공이 됐다.
‘불펜’(bullpen)이란 야구 경기장 내 투수들이 연습하는 장소를 가리킨다. 때문에 보통이라면 이야기에서 불펜의 역할은 “성공을 위한 도약의 장치” 정도로 유용할 것이다. 불펜에서 오랫동안 때를 기다려온 인물이, 마침내 자신의 차례를 맞아 마운드에 등판해 최고의 경기를 선보이는 서사를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이 소설 ‘불펜의 시간’은 제목 그대로 마운드가 아닌 불펜을 소설의 배경이자 삶의 무대로 삼는다. 자연히 “한때는 MVP였지만 지금은 불펜의 시간을 사는 인물들”이 주인공이다.
소설을 이끌어가는 것은 세 명의 인물이다. 한때는 고졸 최고 연봉을 받으며 프로에 입단했을 정도로 장래 유망한 야구선수였지만 트라우마로 인해 입단 후 중간 계투로만 살아가게 되는 혁오. 혁오의 중등야구부 동창이지만 야구를 그만둔 뒤 평범한 증권회사 직장인이 된 준삼. 촉망받는 초등학교 야구선수였지만 여자 야구부가 없다는 이유로 야구선수의 꿈을 포기하고 스포츠신문 기자가 된 기현. 각자의 불펜에서 분투 중인 세 인물이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소설이 전개된다.
그중에서도 소설에 가장 드라마를 부여하는 것은 당연히 현직 야구선수인 혁오다. 혁오는 150㎞를 넘는 구속과 뛰어난 제구력, 여기에 야구 실력보다 뛰어난 리더십에 배려심까지 갖춘 선수다. 그런데 어린 시절부터 혁오를 라이벌로 여겨오던 친구 진호가 프로 데뷔를 위한 고교 전국체전 결승전에서 혁오에게 완봉승을 당한 다음 날 불의의 죽음을 맞는다. 혁오는 자신에게 진호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는 생각을 떨쳐내지 못하고, 이날부터 마운드에 오를 때마다 진호의 환영을 보게 된다. 트라우마로 볼넷만 던지던 혁오가 생각해낸 극복방법은 “이기는 것을 욕망하지 않는 스포츠를 하는 것”이다.
“혁오는 결단했다. 남들과 다른 방식의 야구를 하기로. 이기는 것을 욕망하지 않는 스포츠를 하기로(…)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자기만의 리그를 개설하기로. 혁오는 선발 투수나 마무리 투수가 되는 걸 피하기로 했다. 정확히 말하면 패자를 만드는 일에 소극적이기로 했다. 그래서 경기 중간에 등판해 한 이닝, 많으면 두 이닝을 던지고 내려가는 계투, 앞서 던진 투수가 자기에게 넘겨준 점수를 그대로 다음 투수에게 넘겨주는 걸 목표로 하는 투수가 되기로 했다.”
이러한 혁오만의 경기 방식은 ‘승부조작’ 의혹을 불러일으키고, 특종을 노리던 기현의 구미를 당긴다. 그러나 기현의 취재 열의는 회사의 부조리로 인해 의도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전개되고, 끝내 모두가 각자의 마운드에서 퇴장하는 결말을 불러온다. 그러나 이 퇴장이 세 인물에게는 오히려 합리적인 결말이다. 실패해도 괜찮다는 격려가 아니라, 세계의 부조리를 적극적으로 거부하고 스스로 '쟁취해낸 실패'이기 때문이다.
소설은 승리나 특종, 성과 같은 가치가 지배하는 스포츠계와 언론사, 증권회사를 교차시키며 각자의 부족함으로 이 무대에서 ‘승리투수’가 되지 못한 인물들의 실패담을 그린다. 그러나 “이기는 게 중요할까요? 얼마나 중요할까요? 무엇보다 중요할까요?”라는 혁오의 질문처럼, 이 실패는 다음 승리를 위한 주춧돌이 아니다. 오히려 기존 세계의 ‘룰’을 거부하고 나만의 룰로 펼치는 경기에 가깝다. 소설 ‘불펜의 시간’은 이 새로운 룰을 ‘이겨본 적 없는 자들의 정신승리’로 결론 내지 않기 위해, 작가가 자신만의 룰로 펼쳐 보이는 경기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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