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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0년 전부터 한결같은 인간의 분리의식과 모순성을 무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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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0년 전부터 한결같은 인간의 분리의식과 모순성을 무대로"

입력
2021.07.12 04:30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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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코리올라누스'의 양정웅 연출

연극 '코리올라누스'에서 코리올라누스 역을 맡은 배우 남윤호(맨 오른쪽)를 두고 양정웅 연출은 "미학적인 연기를 추구하는 배우"라며 "이미 성장했지만, 앞으로의 성장이 더욱 기대된다"고 평가했다. LG아트센터 제공

연극 '코리올라누스'에서 코리올라누스 역을 맡은 배우 남윤호(맨 오른쪽)를 두고 양정웅 연출은 "미학적인 연기를 추구하는 배우"라며 "이미 성장했지만, 앞으로의 성장이 더욱 기대된다"고 평가했다. LG아트센터 제공

셰익스피어 최후의 비극 '코리올라누스'는 그 진가에 비해 저평가된 연극 중 하나다. 이따금 국내 소극장 무대에서 공연됐을 뿐 쉽게 만날 수 없었다. 이런 이유에서 지난 3일 대극장(서울 역삼동 LG아트센터)에서 이 작품이 개막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연극계 뉴스가 됐다. 생소한 작품을 공연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양정웅(52) 연출이 있었다.

양 연출은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개회식의 연출자로 유명하지만, 원래 국내 최고의 셰익스피어 전문가다. 극단 '여행자'의 예술감독인 그는 7개 셰익스피어 작품을 만들었다. '코리올라누스'는 양 연출이 2016년 '로미오와 줄리엣' 이후 오랜 공백 끝에 선택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기대를 모았다.

'코리올라누스'를 비롯해 양정웅 연출의 작품들에는 관객이 극에 참여하는 대목이 나온다. 양 연출은 "우리나라의 연희 문화는 애초부터 관객과 어울리며 형성됐다"면서 "사실주의 연극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관객과 소통하는 장면을 강조하는 편"이라고 했다. LG아트센터 제공

'코리올라누스'를 비롯해 양정웅 연출의 작품들에는 관객이 극에 참여하는 대목이 나온다. 양 연출은 "우리나라의 연희 문화는 애초부터 관객과 어울리며 형성됐다"면서 "사실주의 연극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관객과 소통하는 장면을 강조하는 편"이라고 했다. LG아트센터 제공

'코리올라누스'는 기원전 5세기 로마의 전쟁영웅 코리올라누스의 삶을 다룬 정치극이다. 엘리트 군인 출신 코리올라누스는 한때 로마의 권력자가 되지만, 오만함으로 시민에 의해 숙청되고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다. 최근 LG아트센터에서 한국일보와 만난 양 연출은 "나이가 오십이 넘다 보니 인간 본연의 모습을 파헤치고 싶다는 욕구가 강해져서 정치극에 도전했다"면서 "작품의 시대적 배경인 2,5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인간의 분리의식과 갈등 양상은 놀랍도록 똑같다"고 했다.

양 연출이 말하는 '분리의식'은 극에서 로마 귀족과 시민, 로마와 적대국 볼스키 등 관계에서 나타난다. 대립을 표현하기 위해 배우들은 새하얗거나 새까만 의상을 입고 있다. 양 연출은 "현실세계는 사실 회색에 가까운데, 국가와 계층, 젠더 갈등 속에서는 이분법적인 흑백논리만 만연하다"고 지적했다. 무대에서 흑백으로 철저히 제한된 색을 사용한 덕분에 극은 느와르적인 분위기도 풍긴다. 양 연출은 "조직에 배신당하고 복수를 꿈꾸지만 끝내 암살당하는 코리올라누스의 생을 표현한 측면도 있다"고 설명했다.

연극 '코리올라누스'의 무대 배경은 인간의 고립을 상징하는 지하 벙커다. 시위와 전쟁, 회의 등 모든 사건이 이곳에서 일어난다. 양 연출은 "30여 개 디자인 시안을 고민한 끝에 툭 튀어나왔다"고 설명했다. LG아트센터 제공

연극 '코리올라누스'의 무대 배경은 인간의 고립을 상징하는 지하 벙커다. 시위와 전쟁, 회의 등 모든 사건이 이곳에서 일어난다. 양 연출은 "30여 개 디자인 시안을 고민한 끝에 툭 튀어나왔다"고 설명했다. LG아트센터 제공

'코리올라누스'를 국내에 작정하고 소개하는 공연인 만큼 양 연출은 최대한 원작을 살리려 했다. 그는 "해외 공연에서는 장면 순서를 바꾸는 사례도 많은데, 5시간 분량의 대본을 압축했을 뿐 원래 텍스트에 충실하다"고 했다. 다만 몰입도를 올리기 위해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 인물들은 로마 시대의 칼이 아닌 소총을 들고 싸운다. 무대도 고대의 마을이 아닌, 엘리베이터와 큰 환풍구가 있는 잿빛 벙커다. 벙커를 중심 배경으로 선택한 이유에 대해 양 연출은 "조국과 가족으로부터 고립된 주인공을 상징하는 한편 세상과 단절돼 위기에 놓인 현대인을 뜻한다"고 말했다.

조지 버나드 쇼는 이 극을 두고 '셰익스피어의 가장 위대한 희극'이라고 평가했다. 비극이긴 한데, 정치 풍자와 해학이 만만치 않아서다. 일례로 코리올라누스는 로마 최고 관직인 집정관에 오르기 위해 선거에 나선다. 그는 시민을 경멸하지만 면전에서는 표를 얻기 위해 활짝 웃으며 사진을 찍고, 악수도 한다. 선거 시즌만 되면 시장에 가서 어묵을 먹곤 하는 현실 정치인과 닮았다. 양 연출은 "'정치는 지략이고, 가슴(진심)으로 말하면 안 된다'는 극중 대사는 원작 그대로"라며 "시민을 향한 정치집단의 시선은 엘리자베스 여왕 때부터 변한 게 없다"고 했다.

셰익스피어의 풍자는 비단 정치인에 국한되지 않는다. 극중 시민들은 쉽게 선동당해 자신들을 보호해줬던 코리올라누스를 몰아내기까지 하지만 결국 전쟁의 위기가 오자 남 탓을 하며 비겁하게 목숨을 구걸한다. 양 연출은 "셰익스피어는 귀족과 시민 누구의 편도 들지 않았는데, 영원한 선인도, 악인도 없다는 인간의 모순을 꼬집고 있다"고 했다.

'코리올라누스'의 음악은 밴드 '이날치'를 이끄는 음악감독 장영규가 만들었다. 현대적인 전자음이 극중 몰임감을 끌어올린다. LG아트센터 제공

'코리올라누스'의 음악은 밴드 '이날치'를 이끄는 음악감독 장영규가 만들었다. 현대적인 전자음이 극중 몰임감을 끌어올린다. LG아트센터 제공

연극 '코리올라누스'는 15일까지 LG아트센터에서 공연 이후 다음 달 20일부터 이틀간 경남문화예술회관 무대를 찾는다. 20년 역사를 자랑하는 '역삼동 LG아트센터' 무대에 올라가는 마지막 기획 공연이다. LG아트센터는 내년 서울 마곡동으로 이전한다. 양 연출은 "LG아트센터는 해외에 가야만 볼 수 있었던 명작들을 공연하며 예술 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는데, 나도 그 수혜자 중 한 명"이라며 "'햄릿'이 죽고 새 시대가 오는 것처럼 '마곡동 LG아트센터'의 시대도 기대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차기작으로는 후기 낭만극 '템페스트'와 또 다른 정치극 '줄리어스 시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등을 고려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장재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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