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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박자

입력
2021.07.09 19:00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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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얼마 전 바빠서 오랫동안 못 본 친구와 겨우 시간을 맞춰 차 한잔을 했다. 후배가 생겼다는 친구에게 막내 일을 벗어난 소회가 어떠냐고 물으니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후배가 게을러.”

“어떻게 게으른데?”

“일을 너무 늦게 시작해.”

“그래서, 일을 제대로 안 해?”

“그건 아니야. 하면 잘하는데… 일을 너무 미뤄서 옆에서 보고 있으면 답답하고 조급해.”

말문이 막혔다. 일을 제대로 안 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 늦게 시작한다는 이유로 게으르다는 평가를 받다니.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뒤집어쓴 오명에 내가 다 억울했다. 내가 천천히 말을 고르는 사이 친구는 이러쿵저러쿵 자신의 힘듦을 토로했다.

“일찍 시작하면 얼마나 편해. 왜 다 닥쳐서야 밤을 새워가면서 일하는지 모르겠다니까? 미리미리 좀 하라고 여러 번 말해봤는데 못 고치더라고.”

“꼭 너처럼 일해야 하나? 그간 쌓아온 후배만의 박자가 있는 거 아니겠어?”

“그래도 일찍, 부지런하면 나중에 편하잖아.”

“다 자신만의 빽이 있는 법이지.”

그가 모르겠다는 얼굴로 무슨 소리냐고 핀잔했다.

본 적 없는 사이지만 그 사람 편을 들고 싶었다. 따지자면 나도 일을 미루는 쪽이기 때문이다. 부지런한 사람들이 나 같은 부류를 이해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수많은 자기계발서와 성공한 사람들의 조언은 대부분 부지런한 사람들의 편이니까. 나 같은 사람은 언제나 나쁜 예에 속했다. 아침형 인간과 미루지 않는 삶을 찬양하는 사회에서 할 일을 미루며 올빼미 족으로 사는 건 어딘가 찝찝하고 괴로웠다. 한 번도 내일을 허투루 한 적 없었지만 남들보다 늦게 일어나고 늦게 일을 시작한다는 이유로 나는 곧잘 게으른 사람이 되었고 죄책감과 박탈감을 느껴야 했다. 그런데 이렇게 30년을 살아보니 이제는 스스로를 변호할 수 있다. 우리 같은 부류(?)가 그동안 너무 평가절하되어 왔다는 사실을 지금은 알기 때문이다. 나는 베스트셀러의 조언처럼 모범적으로 살고 있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내 할 일을 제대로 한다. 남만큼 나도 내 일에 열과 성을 다하는 것이다. 단지 에너지 분배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부지런한 사람은 에너지를 쪼개서 사용하는 데 능한 거고 나 같은 사람은 막판에 에너지를 들이붓는 데 능한 거 아닐까. 정말이지 막판에 닥치면 전에 없던 에너지와 아이디어가 폭죽처럼 팡팡 터진다. 그 순간을 위해 그 전엔 여유로운 마음으로 여기저기서 영감을 얻으며 에너지를 축적하는 것일 뿐 절대로 천하 태평하게 늘어지는 것이 아니다. 습관을 바꿔보려고 미리 일을 시작해본 적도 물론 있다. 허나 그때마다 뒤늦게 솟는 아이디어 때문에 기껏 한 일을 다 갈아엎어야 했다. 남들보다 조금 늦게 시작해서 폭발적으로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방식이 나에게 맞는 것이다.

“너는 부지런한 과거의 너에게 선물을 받으며 사는 거고, 네 후배나 나 같은 사람들은 틀림없이 해낼 미래의 든든한 나를 믿으며 사는 거지. 둘 다 결국 할 일만 제대로 하면 되는 거 아닌가? 너는 과거의 네가 빽이고 나는 미래의 내가 빽이야.”

내 말에 친구는 여전히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평생을 따라다니는 게으르다는 오명을 생애 최초로 반박한 나는 몹시 후련했다.



강이슬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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