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뒤로'의 창간인 이도진 1986.10.15~ 2020.7.12)
'뒤로(DUIRO)'라는, 야릇한 이름의 잡지가 있다. 2016년 만 29세 게이 디자이너 이도진이 만든 퀴어 전문 독립 연간지다. 창간호 테마는 '군대'였다.
'군형법 92조 6항' 즉 군대내 동성간 성행위 처벌 조항을, 국가인권위 폐지 권고(2006)에도 불구하고, 의회가 '1년이하 징역'(1962)에서 '2년이하 징역'(2013)으로 오히려 개악해 유엔 자유권규약위원회 등 국내외 인권단체가 혀를 차던 때였다. 2015년 이도진은 '우리는 뒤로 하고, 앞으로 나아간다'는 도전적 문구를 달고 잡지 창간 텀블벅 모금을 감행, 일주일 만에 목표액 1,000만 원을 모았다. 예비역 게이 인터뷰와 에세이, 설문조사, 20년도 더 전에 관련법을 폐지한 영-미 등 외국 사례 등을 담은, 대한민국 최초 퀴어 전문 잡지가 그렇게 탄생했다.
아무도, 공개적으로 말하지 않던 '그들(게이)'만의 군대 이야기를, 그렇게 처음 불특정 다수에게 털어놓은 거였고, 그럼으로써 의식-무의식적으로 갖추고 살던 자폐적 고립의 가드를 먼저 내린 거였다. 책을 좋아해서 북디자이너로도 일한 이도진은 "저는 책을 '대화'라고 생각한다"고, "읽는 것, 만드는 것 모두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라고 쓴 적이 있었다.
'뒤로'의 근사함은 저런 의미보다 먼저 감각적으로 도드라졌다. 그와 동료들은 여느 사진예술전문잡지와 견주어도 꿀리지 않을 사진과 그림과 디자인 작품들을, 호기심의 춘화적 탐닉을 경계하듯 절제하며 글과 함께 동여맸다. 그에겐 '도진이 일'이라면 발벗고 나서던 프로 디자이너와 사진가 등 온갖 장르의 예술가들이 있었고, 또 그들의 지인들이 있었다. 이도진과 친구들은, 여러 다리 건너야 닿을 수 있는 필자와 인터뷰이를 발굴해 더불어 책을 지었고, 그렇게 자신들의 네트워크를 점점 광역화했다. 잡지는 자폐의 벽을 허문 작은 아지트를 넘어 무한 확장의 벡터를 지닌 현실의 커뮤니티로 성장해갔다.
이도진은 그 또글또글한 희망을 잡지 형식에도 담고자 했다. 뒤 표지에 하나하나 음각(형압)으로 새긴 필자들의 이름이 그 예다. 당시는 지금과 또 달라서, 성정체성의 다름을 타락의 동의어로 알던 이들이 훨씬 드글거렸다. 필자 중에도 이런저런 사정으로 실명을 감추고 싶어한 이들이 있었다. 이도진은 빛이 없는, 그래서 그늘도 없는 자리에선 쉽사리 드러나지 않을 형식으로, 시간의 더께가 손때로 얹히며 서서히 드러날 체적으로 그들의 존재를 새겼다. 표지 후처리 공정에는 돈이 더 들고, 그의 처지는 늘 푼푼치 못했다.
하지만 창간호의 가장 아름다운 면모는, 내 생각에는, 책 어디에도 발행인인 그의 이름이 없다는 점이다. 누구보다 할 말이 많았을 그는 그 흔한 창간사도 발행인의 글도 싣지 않았다. 그 이유를 그는 공개한 적이 없다. 겸양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하나라도 더 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그는 잡지 자체가 자신을 대변해주리라는 기대, 혹은 고집의 표현이었을지 모르다. 공백과 무언의 표현. 그는 한 매체 인터뷰에서 "매번 폐간호를 만든다는 생각으로 잡지를 만든다"고 말한 적이 있다.
2호부터 편집장 겸 유일한 편집자로 참여한 원대한(그래픽디자인스튜디오 '씨클레프' 대표)에 따르면, 잡지를 만드는 데는 기획 단계서부터 꼬박 10개월, 필자 섭외에서 원고가 인쇄소에 넘어갈 때까지만 쳐도 최소 6개월이 걸렸다. 이도진과 원대한은 평일엔 각자의 스튜디오를 운영하면서, 주말·밤 시간과 제 돈을 헐어 저 일을 해냈다.
'뒤로'는 동성혼과 시민결합을 테마로 한 이듬해 2월의 '혼인(The Marriage)'과 '외로운' 퀴어들의 반려동물과의 교감을 다룬 '룸메이트(Roommate, 2018년 10월)'까지 세 권이 나왔다.
수직감염으로 만성 간염 바이러스를 지녔지만 제 몸 돌볼 겨를은 없었던지, 이듬해 3월 이도진은 어깨 통증때문에 찾은 병원에서 간암 3기 진단을 받았고, 친구들의 따듯한 배웅을 받으며 1년 전 오늘(2020년 7월 12일) 별세했다. 향년 만 33세.
목사 아들 게이
'목사 아들 게이'는 2017년 그가 단행본으로 펴낸 목사 아들 게이 5명의 대화록 제목이다. 이도진은 동성애(자)를 적대하는 부모와 교회 지붕을 함께 이고 게이로 성장한 이들의 고통과 죄의식, 분노와 설움을 유쾌한 농담과 에피소드로 버무렸다. 책에서 그(필명 더즌)는 아버지를 장로교 소속이었다가 교단서 탈퇴한 좌파 성향 독립교회 목사라 소개했다. 객지를 떠돌며 배운 미용 기술로 고향서 작은 미용실을 열어 아버지 신학대 학비를 댄 어머니도 아버지 못지않은 신앙인이었다. 아버지는 "성도가 모인 공동체가 곧 천당"이라 설교했고, 어머니는 공동체(타인)를 위한 배려와 헌신이 신에 대한 경배라 가르쳤다. 그 선량한 부부는 시골교회 목사의 애처로운 월급을 쪼개 형편이 어려운 아들의 급우 급식비를 대신 내주기도 했다. 이도진과 여동생은 생일에도 선물이나 케이크는커녕 부모에 대한 감사와 보은의 의미로 설거지를 했다.
성 정체성을 일찌감치 깨달은 조숙한 소년 이도진은 중학생 때부터 급우들을 꾀어 학교 화장실을 쾌락의 공간으로 활용하곤 했고, 벽 너머 예배당 찬송가를 들으며 하이텔 천리안의 살빛 영상들을 탐닉했다고 한다. 대개가 그렇듯 욕망과 죄의식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그는 성장했다.
교인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한다며 집 청소에도 강박적이던 어머니가, 납득할 수 없는 전화요금 고지서와 컴퓨터에 남겨진 아들의 웹 서핑 흔적을 모르지 않았을 아버지가, 대학생(세종대 시각디자인 전공)이 된 그에게 어느 날 정색하며 '할 말 있으면 해보라'고 했다고 한다. 그는 "아빠, 뭐? 동성애자?"란 대꾸로 커밍아웃했고, 부모는 결혼 앞둔 동생을 위해서라도 조용히 지내라고, "사도 바울처럼 (독신으로) 살라"고 주문했다고 한다. 부모에게 게이는 '성도'도, 신을 향한 경배를 대신 받을 '타인'도 못 되는, 한사코 감춰야 할 존재였다. 이도진은 그러겠다고 대답했지만, 그 약속은 물론 가망 없는 거였다. 대학 졸업 전시를 앞둔 2012년 11월, 그는 연애를 시작했다.
새를 업고 나는 새
피아노를 익혀 교회에서 봉사하고 중학교 시절 밴드를 결성해 활동하기도 했던 이도진은 대학서도 학교 생협 이사장을 맡아 이끌고, 군대 휴학 중 친구(이경민, '뒤로'1호 기획/디자인)와 디자인회사를 차려 운영하기도 했다. 계약직 1년을 거쳐 정식 입사한 첫 직장(민음사)에서 3개월 만에 부당해고를 당한 뒤 SNS로 싸움을 벌여 이긴 전력도 있었다. 그는 늘 '일'을 벌이곤 사람들과 함께 내닫는 스타일이었다. '뒤로' 2호의 필자 소개에 그는 "주저하는 이의 등 떠미는 것이 취미이자 특기"라고 썼다.
그는 한 잡지('두꺼비')가 기획한 '청년주거문화'의 꼭지 하나를 맡으면서 공동 작업자로 2년 연하의 국민대 시각디자인과 박철희(스튜디오햇빛 대표)를 만났다. 그 무렵까지 자신의 성정체성을 의심(혹은 부정)하던 박철희에게 이도진은 일에 돌진하듯 돌진했다고 한다. 어느날 이도진은 "게이 잡지를 만들 것"이라고 말했고, 박철희는 "나도 끼워 달라"고 대답했다. 두 달여 뒤 둘은 연인이 됐고, 2014년 용산구 보광동 우사단길에 함께 살 집을 마련했다. 박철희는 "외진 캠퍼스에 칩거하듯 지내며 작업만 하던 내게 이도진은 서울이란 너른 세계와 게이-인디 문화의 다채로운 세상을 알게 했다"고 말했다. 이듬해 6월 서울광장에서 처음 열린 대규모 퀴어문화축제에 둘은 나란히 손잡고 참여했다.
석 달 뒤, 뒤늦게 고양된 박철희는 대학원서 조교하며 모은 돈으로 보광동에 한국 최초 퀴어 전문서점인 '햇빛서점(겸 스튜디오)'을 열었다. 또 석 달 뒤 이도진은 '뒤로'를 창간했다.
이도진의 디자인스튜디오 이름은 '프레클스(Freckles, 주근깨)'였다. 햇빛에 노출된 피부에 생기는 작은 반점인 주근깨를 미용적 결함으로 못마땅해하는 이들이 많지만, 어떤 이들은 거기서 햇살의 첫정같은 사랑을 찾기도 한다. 이도진은 무지개를 등지고 환한 햇빛 앞에 선 성소수자들의 미래를, 저 이름에 담고자 했을지 모른다. 아니면 반려자의 얼굴에 깃들인 주근깨들을 떠올렸을 수도 있다. 새를 업고 나는 새를 새긴 판화가 히로카와 다케시의 작품에서처럼, 그렇게 둘은 함께 날았다.
더불어 미치다
이도진은 자칭 '생계형 디자이너'였다. 공연과 전시 포스터, 책 디자인 등으로 그는 생활비를 벌었다. 하지만 스튜디오 공간 절반을 헐어 진행한 기획 전시와 친구들과 함께 벌인 여러 프로젝트는 대부분 생계와 무관한, 잡지처럼 돈 쓰며 하는 활동이었다. 예컨대 사진작가 9명과 함께 청소년을 주제로 엽서를 제작해 판매한 '피넛버터 프로젝트-Eternal Summer'로 그들은 청소년 성소수자 위기지원센터 '띵동'을 후원했다.
2018년 7월 제19회 서울 퀴어문화 축제때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작가들이 동성애를 형사처벌하는 75개국 국기로 만든 드레스(작품명 '암스테르담 레인보우 드레스')의 아시아 최초 한국 전시 사진 아트디렉터 겸 디자이너로도 참여했다. 그는 늘 바빴고, 하나를 끝내면 곧장 새로운 일을 향해 내닫곤 했다.
잡지와 햇빛총서 단행본은 늘 적자였다. 하지만 그를 더 힘들게 한 건 "책에 참여해 줄 사람들을 찾는 것"과 "독자들이 가시화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는 미국서 동성혼이 법제화되면서 동성애자 커플의 (경제적)계층화가 시작된 현실, 차별을 넘어선 자리에 새로운 분화와 차별이 싹튼 현실을 씁쓰레했다. 스마트폰 데이팅 앱 등으로 동성애자 교류의 기회는 늘었지만, 다양한 다수가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오프라인 공간은 오히려 줄었다. 그는 그 변화를 안타까워했다.
'뒤로 '3호 제작 직전, 인쇄소에서 다른 고객들 눈치를 보느라 제작을 거부했을 때 그는 분노했고, 2018년 8월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온라인매체 '인문360'이 '성소수자 연애'를 주제로 그와 진행한 인터뷰를 공무원들이 지워버렸을 때 그는 분노했다. 투병하던 그에게 목사 친척이 "간이랑 폐에 문제가 생긴 이유는 음란함 때문"이라고 했을 때도 그는 분노했다.
하지만 쪼들려서 주눅들거나 현실을 원망한 적은, 적어도 겉으로는 없었다. 친구(금속공예가 조유리, 서울메탈 대표)의 강아지가 아파 병원비로 큰 돈이 들게 되자 배지를 디자인해 만들어 팔게 했고, 다재 다능한 음악인 이랑은 조유리와 함께 노래('사는 동안 즐겁게')를 지어 병원비를 벌었다. 다들 고만고만 힘들어도 어쩌면 그때가 그의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고, 보광동 커뮤니티의 전성기였다.
2018년 박철희는 그 특유의 한글 디자인을 가미한 2018년 서울시장 녹색당 후보 신지예 선거포스터로 사회적 주목을 끌며 디자인하우스 '코리아 디자인 어워드' 커뮤니케이션 부문 최우수상을 탔다. 이도진도 그해 말 한 대기업의 2019년 사보 디자인 계약을 맺었다. 그렇게 조금씩 형편이 나아지려던 무렵 암이 찾아왔다.
앨리바바와 30인의 친구친구
암세포도 그를 닮았던지, 병세는 빠르게 나빠졌다. 그를 간병하느라 박철희도 일을 접어야 했다. 몇 달 사이 생활비가 떨어졌다. 그해 6월, 이랑과 친구 서른 명이 매일 한 사람씩 글을 지어 메일로 회원에게 전하는, 유료 이야기 마라톤을 시작했다. 이도진-박철희를 돕기 위해 연말까지 6개월간 진행된 '앨리바바와 30인의 친구친구' 프로젝트였다. 디자이너 원대한, 에세이스트 임진아, 소설가 이종산, DJ CongVu, 식물세밀화가 이소영, 판화가 히로카와 다케시, 드랙퀸 모어 모지민, 시인 황인찬, 카투니스트 조한수, 사진가 정멜멜과 황예지-박현성 듀오, 일러스트레이터 윤예지, 소목장 세미, 금속공예가 조유리, 편집자 김미래와 김홍구, 아키비스트 정아람….
그 보답으로 이도진은 박철희가 발렌타인데이 선물로 보광동 집 옥상에 지어준 두 평 짜리 비닐하우스 텃밭에 튤립 구근 서른 개를, 친구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심었다. 이듬해 봄 꽃이 피면 친구들을 초대해 한 송이씩 나눠준다는 게 그의 계획이었다. 그 꽃들을 전달되지 못했다. 보광동 젠트리피케이션이 빠르게 진행되면서 그 겨울, 친구들은 더 헐한 작업실을 찾아 하나 둘 뿔뿔이 흩어졌다. 이도진-박철희도 이듬해 4월 만 6년을 산 보광동을 떠났다.
닳고 다른 몸
병원에서 더는 해줄 게 없다던 무렵 이도진-박철희는 강원 양양 바닷가에 작은 집을 얻어 요양을 시작했다. 둘이 만난 지 6주년 되던 해 처음 만나 흠뻑 반한 바다였다. 이도진은 물과 햇살에 닳고 마른 해변의 폐목 조각들을 주워 사진에 담고는 '닳고 다른 몸'이란 이름을 달았다. 무척 깔끔하고 예민한 성격이라 박철희와 평소 그렇게 자주 티격거렸다는 그였지만 정작 투병 중에는 단 한 번의 짜증도 부리지 않고 순했다고 한다. 박철희는 "도진이가 '다시는 인간으로 태어나고 싶지 않다'고 말한 적이 있다"고, "더 살겠다는 의지도 미련도 없이 주어진 날들을 묵묵히 살다가 홀연히 가려 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매번 폐간호를 만들듯 그렇게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처럼 살다가, 발행인의 말 없는 잡지처럼 그는 유언 없이 떠났다. 강원지역 한 단체가 발행하는 잡지 청탁으로, 떠나던 날 아침까지 붙들고 있던 글의 커서도 맺지 못한 문장 중간에 함께 멎었다.
첫 기일인 오늘, 친구들은 이도진이 묻힌 전북 부안 가족묘지 대신, 그의 마지막 나날을 넉넉히 품어준 양양 바다로 그를 만나러 간다고 했다. 어쩌면 거기서 '뒤로' 4호 이야기가 나올지도 모르겠다.
(수정) 한국의 첫 성소수자 단체로 1993년 12월 설립된 '초동회'가 이듬해 1월 25일 '초동회 소식지'를 발간했고, 여성동성애자인권모임 '끼리끼리'가 기존 격월간 소식지를 개편해 레즈비언 교양 정보지 '또 다른 세상'을 96년 봄 창간한 바 있습니다. 또 출판사를 등록해 정식 출간한 최초의 퀴어 잡지는 98년 3월 통신모임 '또 하나의 사랑' 활동가들이 창간한 'Buddy'입니다. 서울퀴어문화축제조직위원회 서울퀴어퍼레이드집행위원장 강현주님이 알려주셨습니다. (7월 15일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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