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대 3 보수 많지만 '오바마케어' 유지 판결
동성 커플 부당 차별 인정 때도 보혁 타협
투표권 제한은 강행… 낙태권 번복 우려도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재임 시절 ‘보수 우위’ 구도로 인적 구성을 재편한 미 연방대법원이 민감한 현안 판결에선 의외의 균형감을 발휘하고 있다. 당파적 분열상이 뚜렷하고 타협이 실종된 정치권과는 차별적인 모습을, 일단 지금까지는 보여 주고 있다는 평가다. 하지만 낙태권이나 총기 휴대 제한처럼 보혁 간 첨예한 의견 대립을 빚는 사안이 의제가 되는 순간엔 결국 ‘보수 본색(本色)’이 드러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5일(현지시간)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FT)는 지난해 10월 에이미 코니 배럿 대법관 합류로 ‘보수 6 대 진보 3’ 구도가 된 미 연방대법원이 당초 보수 진영 기대만큼 우경화하진 않았다고 분석했다. 70건 가까운 첫 회기 판결들을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생전 ‘진보의 아이콘’으로 불린 고(故)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이 지난해 9월 별세하자 트럼프 전 대통령과 공화당은 속전속결로 한 달 만에 보수 성향 후임 지명과 일방적 의회 인준을 마무리했고, 같은 해 11월 대통령 선거 전에 기어코 ‘우편향 연방대법원’을 만들어 냈다. 미 연방대법관은 종신직이다.
그러나 미국의 최고 법원은 예상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오바마케어(전국민건강보험법·ACA)’ 유지 판결이 대표적이다. 지난달 17일 연방대법원은 “미가입 시 벌금을 내게 하는 조항이 위헌인 만큼 오바마케어를 무효로 해 달라”며 텍사스 등 공화당 우세지역 18개 주(州)와 개인 2명이 낸 소송에서 기각 판결을 내렸다. 2010년 제정된 오바마케어에 대한 공화당의 세 번째 폐지 시도가 무산된 것이다. 보수 대법관 4명이 진보 3명의 의견에 동조한 결과였다.
종교적 신념을 이유로 동성 커플에게 꽃을 팔지 않겠다고 했다가 소송을 당해 패소한 업주의 상고를 기각한 이달 초 판결도 마찬가지다. 당시 의회전문매체 더힐은 “차별 없는 성(性)소수자 보호가 종교 자유를 보장한 수정 헌법 제1조와 상충한다는 게 보수 진영의 믿음”이라며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아마추어를 핑계로 보상 없이 착취한다’며 미국대학스포츠협회(NCAA)를 상대로 소송을 건 대학 스포츠 선수들 손을 만장일치로 들어준 판결(지난달 21일), 학생의 표현 자유가 학교의 외부 발언 규제권보다 우선이라는 취지의 판단(지난달 23일) 역시 ‘보수 절대우위 대법원’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게 FT의 설명이다.
이런 뜻밖의 판결은 정치권보다 사법부에서 정파 간 타협이 오히려 더 활발하다는 사실의 방증이다. 조너선 털리 미 조지워싱턴대 로스쿨 교수는 “(연방대법원 내) 의견 대부분은 (보혁 간) 경계가 명확하지 않고, 연방대법관 역시 기계처럼 반응하는 사람들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미 로펌 윌머 헤일의 파트너 변호사 데보 아데그빌은 “보수화했어도 극심하게 분열된 정치 환경 및 국가에서 자신의 합법성과 신뢰성을 생각해야 하는 기관이라는 게 연방대법원의 정체성”이라고 했다.
아무리 그래도 ‘보수는 보수’라는 게 진보 측 걱정이다. 이념 지형대로 찬반이 깔끔하게 갈린 이달 1일 애리조나주 투표권 제한 인정 판결이 단적인 사례다. ‘투표 사기’를 막는 게 더 중요하다며 공화당 편을 든 보수 대법관들에게 유색 인종과 원주민 투표권 침해 소지가 있다는 민주당의 호소는 먹히지 않았다. “민주주의와 투표권이 다뤄질 땐 ‘공화당 성향’ 대법관들이 똘똘 뭉친다”는 게 민주당 측의 얘기다.
관건은 현재의 균형 감각이 ‘얼마나 가느냐’다. 중간선거를 앞두고 내년 봄이나 여름에 나올 것으로 보이는 낙태권, 총기 휴대 제한 관련 판결이 시금석이 될 것이라고 FT는 내다봤다. 연방대법원은 보혁 대립이 첨예한 두 사안을 10월 시작되는 다음 회기에 심리하기로 했는데, 사건 검토 자체가 판례 변경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보수 진영은 특히 낙태권을 인정한 1973년 판결이 뒤집히기를 바란다. 정치적 판결은 선거 전 보수층 결집에 유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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