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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성백혈병 왜 빨리 발견 못했을까요" 원망 섞인 질문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입력
2021.07.20 17:00
수정
2021.08.30 18:00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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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오승원 가정의학과 전문의

편집자주

의사라면 평생 잊지 못할 환자에 대한 기억 하나쯤은 갖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생명을 구한 환자일 수도 있고, 반대로 자신에게 각별한 의미를 일깨워준 환자일 수도 있다. 아픈 사람, 아픈 사연과 매일 마주하는 의료종사자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50대의 그 여성이 처음 진료실을 찾은 건 고혈압 때문이었다. 그는 의사의 지시를 잘 따르는 환자였고 혈압 조절도 잘되는 편이어서 서너 달마다 오는 진료 시간은 대개 특별한 변화 여부만 확인하는 걸로 채워졌다. 작년에는 폐경기 증상이 찾아와 힘들어하기도 했다. 나는 걷기 운동을 권했고, 그는 처방 역시 충실히 따랐다. 남편과 함께 동네의 둘레길을 걸으면서 불편했던 증상도 차차 누그러졌다.

지난겨울엔 갑자기 비염 증상이 생겼는데,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가 원인이었다. 딸이 키우던 고양이인데 딸이 유학을 가면서 어쩔 수 없이 맡게 되었다고 한다. 고양이를 떼어 놓으면 해결될 증상이었지만 이젠 정이 들어버려 그럴 수 없다고 했다. 진료실에서도 그녀는 연신 재채기를 했는데, 이후 증상은 항히스타민제를 처방하는 것으로 해결되었다.

환자와의 진료실 대화 주제는 처음 병원을 찾은 직접적인 문제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이사, 자녀의 졸업, 가족의 사망과 같은 집안의 대소사가 될 수도 있고, 최근에 새로 생긴 건강 문제일 때도 있다. 만남이 반복되며 대화 주제가 다양해질수록 환자에 대한 이해도 깊어지지만 그 과정이 늘 평탄하지는 않다. 오히려 대개 만족감과 무력감, 생명을 다루는 보람과 부담 사이에서 좌충우돌하는, 불확실과 난기류가 가득한 복잡계의 항로와 같다.

어느 외래 진료 전날, 예약된 환자들의 진료 기록을 미리 살펴보던 중이었다. 익숙한 그의 이름과 며칠 전에 시행한 혈액 검사 결과가 눈에 띄었다. 적혈구와 백혈구, 혈소판 수치가 정상을 한참 벗어나 있었다. 졸음으로 무겁던 눈꺼풀이 번쩍 뜨였다. 이 결과만으로 결론을 내리긴 어려웠지만, 악성 혈액 질환의 가능성도 고려해야 했다. 나는 과거 혈액 검사 결과를 다시 확인했다. 몇 달 전의 검사 결과엔 가벼운 빈혈 소견만이 있었고, 다음 진료 때 변화를 확인하는 것으로 계획했었다. 그 재검 결과가 이번 수치였다.

진료 시간에 맞춰 찾아온 그에게 검사 결과를 설명했다. 그에겐 특별한 증상이 없었다. 정확한 병명을 말하긴 이른 상황이었다. 혈구 세포들이 많이 줄어든 상태이며 이유에 대한 확인을 해야 한다고, 다시 검사가 필요하며 골수 검사를 해야 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약간 놀란 듯했지만 추가 검사와 혈액 내과 진료를 받아야 한다는 권유를 순순히 따랐다. 진료실 밖에서 대기 중인 환자 수를 어림하며 신속하게 말을 이어가는 동안, 나는 몇 달 전 발견한 빈혈의 원인을 그때 바로 찾았다면 어땠을지를 생각했다.

한 달 뒤, 진료 예약자 명단에서 그의 이름을 발견했다. 원래 예약된 일정보다 이른 날짜였다. 그동안의 진료 기록을 확인했다. 골수 검사 결과는 급성 백혈병이었다. 그에게 필요한 건 빠른 항암 치료였고, 지금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굳이 지금 그가 나를 찾은 이유는 무엇일까. 마음이 무거웠다.

그는 현재 상태에 대해 내게 한 번 더 설명을 듣길 원했다. 그와 같은 환자들이 받는 치료에 대한 내 설명을 묵묵히 듣던 그가 질문을 던졌다.

"선생님께 진료도 꼬박꼬박 받았는데, 왜 더 일찍 발견하지 못했을까요."

항상 담담하던 그의 말투는 떨렸고, 나는 그 뒤에 담긴 후회와 원망을 느꼈다. 순간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는 마치 이전 검사 결과에서 보였던 빈혈을 왜 그냥 지나쳤는지를 묻고 있는 것 같았다. 가벼운 빈혈이 있는 중년 여성에서 백혈병이 발견될 확률은 얼마나 될까. 빈혈의 원인을 빈도 순으로 나열한다면 급성 백혈병은 한참 뒤에 있을 것이다. 당시에 추가 검사를 했다 해도 바로 진단이 가능했을지는 확신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때 진단이 되었다면, 몇 개월의 차이가 미치는 영향은 과연 없었을까. 이것 역시 확신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사실이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몇 달 뒤 그를 다시 만났다. 지난번보다 표정이 밝았다. 항암 치료 결과가 좋았고, 골수 이식 없이 완치가 될 수도 있을 거라 들었다고 했다. 환자의 경과는 그동안의 진료 기록으로 대략 알고 있었지만, 편안해 보이는 그의 얼굴을 직접 대하니 나도 기뻤다.

"항암 치료를 받을 땐 참 힘들었는데, 선생님 덕분에 제때 발견해 치료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저는 그래도 운이 좋은가 보네요. 선생님께 감사하단 말을 꼭 하고 싶었어요."

그의 행운에 감사해야 할 사람은 오히려 나였을지도 모른다. 진료실에서의 일상이란 불확실의 바다 위를 항해하는 것과 같다고 종종 생각한다. 교과서를 통해 얻은 지식은 내 앞에 있는 환자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선 정확한 답을 주지 않는다. 불확실은 도처에 존재한다. 의사인 나는 겸손한 마음으로 그저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 가운데서 의사도 환자와 마찬가지로 불안해하고, 무력감을 느끼고, 상처를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점은, 그 과정을 통해 스스로가 의사로서, 한 인간으로서 성장해왔다는 것이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믿는다. 그 믿음을 발판 삼아 나는 오늘도 불확실의 바다 위를 걷는다.

서울대병원강남센터 가정의학과 교수

서울대병원강남센터 가정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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