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음주사건으로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
버스 기사와 화해하고 형님 동생하는 사이로?
야구 열정을 일깨워 준 소년 "나의 첫 제자"
"신뢰나 명예는 돈으로 살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날 저는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한순간에 저를 둘러싼 세상이 변해버렸죠."
'부산의 심장'. 야구팬들이 롯데 자이언츠 레전드 박정태(동강중 클럽야구단 대표)를 언급할 때 붙이는 수식어다. 현역 시절 보여준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 덕분에 수많은 팬들을 몰고 다녔지만, 현역에서의 활약에 비해 은퇴 이후 프로에서 활동한 기간은 길지 않았다. 롯데 자이언츠 1군 타격코치와 제3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국가대표팀 코치를 마지막으로 2012년 이후 프로에서는 거의 모습을 감추었다. 야구를 떠난 적은 없었다. 리틀 야구단과 다문화 어린이 야구단, 그리고 아동보육시설 야구 지도, 새터민 출신 청소년들에 대한 야구 지도, 사회인 야구 지도 등으로 야구인의 삶을 이어갔다. 재능 기부는 현역부터 꾸준히 실천해온 일이었다.
버스 기사 "정태 형님, 제발 전화 좀 받아주십시오!"
2019년 박정태라는 이름이 다시 한번 폭발적으로 회자됐다. 선수 시절과는 180도 다른 성격의 소식이었다. 음주운전 사건이 터진 거였다. 그날 이후 모든 것이 변했다. 경제적인 타격은 말할 것도 없고 팬들의 신뢰가 무너지면서 말 그대로 허공에 붕 뜬 상태가 되어버렸다. 그는 "바닥 밑으로 뚫고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하루 하루 버티는 것이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때때로 안 좋은 생각이 덮쳤다. 가까운 이들이 수시로 안부를 물어올 정도였다.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 모 지상파 방송국에서 박정태를 모델로 한 드라마 제작을 결정하고 구체적인 사안에 대한 대화를 주고받고 있던 중이었다. 바둑 레전드 이창호가 '응답하라 1988'를 통해 그러했던 것처럼, 야구 레전드 박정태도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비상하려던 찰나였던 거였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날아가 버렸다.
사건이 벌어진 것은 2019년 2월이었다. 버스 기사와 도로변에서 실랑이를 벌였다. 버스 기사가 집요하게 길가에 주차해 놓은 차를 빼달라고 요구한 것이었다. 박 대표는 버스가 충분히 통과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길가에 주차해 놓은 상태였다. 결국 운전대를 잡았고, 버스 기사가 운전하는 버스에 올라타기도 했다. 이후 앞뒤가 잘린 CCTV 영상에 공개되고 사건이 버스 기사의 증언 위주로 구성돼 알려지면서 박 대표의 위상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온전한 영상이 공개되고 당시 버스에 탔던 이들의 증언들 덕분에 사건의 전말이 재구성되었지만 대중은 수정된 소식에 큰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아무리 해명해도 바닥에 떨어진 위상은 옴짝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형님, 이 마스크 야구하는 아이들에게 전해 주십시오"
사건이 터진 얼마 후 버스 기사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처음 전화를 받았을 때 "다시는 전화하지 마라"고 고함을 쳤다. 몇 차례 더 전화를 걸어와서 "제발 전화 끊지 마세요. 합의를 해야 합니다. 전화를 끊으시면 제가 합의를 못 합니다"하고 사정했다.
버스 기사를 만나 사과까지 받았지만 그에게 남은 건 '상처'뿐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억울한 것만은 아니다"고 했다. 지금까지도 잘못 알려진 부분이 많고 곡해도 있지만 스스로에 대해서 "무죄하지 않다"고 고백했다.
"제가 교만하게 살았습니다. 그 대가를 받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버스 기사와 형님 동생 하면서 지내고 있다. 지난달에는 버스 기사가 "야구하는 아이들에게 전해달라"면서 마스크를 몇 박스나 보내왔다.
얼마 전에는 그의 부친이 생일을 맞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케익을 사서 직접 전달하기도 했다. 이날도 해프닝이 있었다. 케익을 건넸더니 "아버지가 당뇨가 있다"면서 단 맛이 덜한 케익을 달라고 했다. 포장을 풀고 떡케익으로 다시 포장해서 줬다. 박 대표는 "참 재미있는 친구"라면서 허허, 웃었다. 그는 "어제도 그 친구와 통화했다"면서 "종종 전화를 주고받는다"고 말했다.
"지금은 웃으면서 이야기를 하지만 그때는 정말 너무 힘들었죠. 부산 팬들이 얼마나 열정적입니까. 그 애정과 사랑이 적의로 돌아설 때의 느낌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선수 시절 받은 사랑을 팬들에게 어떻게 돌려드려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시기였는데, 그런 뜻밖의 사건으로 모든 게 물거품이 되어버렸죠. 사람이 이래서 안 좋은 마음을 먹는 건가 싶더군요."
잠시 먼 하늘을 쳐다보던 박정태가 싱긋 웃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어요."
잊고 있던 열정을 다시 일깨워준 소년
그렇게 말하는 박정태의 눈빛이 빛난다. 그는 "그 친구를 만난 덕분에 두 번째 인생이 시작됐다"고 말했다.
어느 날 밤, 아이들에게 야구를 가르치는 이원준 코치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부산 사직동 모 야구 연습장에서 '물건' 하나를 발견했다는 거였다. 이 코치에 따르면 한 아이가 며칠 전부터 구석에 서서 훈련하는 모습을 훔쳐봤다. 이리 오라고 불렀더니 도망가 버렸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찾아와서 훈련 모습을 지켜봤다. 그렇게 2주가 흘렀다. 아이는 교육 장면을 숨어서 지켜보는 데서 그치지 않고 구석에서 혼자 타격 자세를 흉내 내면서 스윙을 했다. 이 코치 쪽에서 아이의 정체가 너무 궁금해서 아이를 붙들고 "왜 구석에 숨어서 그러고 있냐"고 물었다. 쭈뼛거리던 아이가 이렇게 대답했다.
"저도 트레이너에게 교육을 받고 싶은데, 집 형편이 좀 그래요."
동생도 두 명이나 있고 어머니가 일을 하고 있어서 정식으로 수업을 받기는 힘들다는 설명이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방해하지 않을 테니 혼자서 보고 따라 하면 안 될까요. 제발 쫓아내지 말아주세요."
이 코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 같더라고 했다. 마치 망치로 머리를 한대 꽝, 맞은 느낌이었다고. 즉시 박 대표에게 전화를 넣었다.
"비용은 제가 부담해서라도 시키고 싶으니까 어떻게든 이 아이 좀 맡아주십시오."
박 대표가 "그게 뭐 대수라고" 하자 통화하던 코치 옆에서 수화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아이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펑펑 울었다. 초등학교 6학년의 울음이라고 하기 에는 너무도 깊고 복잡한 감정이 읽히는 황소울음이었다. 아이를 만나본 박 대표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그 아이에게는 그동안 내가 잊고 살았던 그 무엇이 있었어요. 그게 뭘까, 스스로에게 몇 번이나 되물었죠. 결론은 야구에 대한 열망, 고마움, 간절함 같은 것들이었어요. 저도 한때 너무도 간절하게 야구만 갈망할 때가 있었거든요. 야구만 할 수 있으면 영혼이라도 팔 수 있겠다는 열정, 그게 그 아이에게서 발견한 순수였어요. 심장이 유리처럼 '쨍' 하고 깨지는 느낌이었어요."
코뼈가 부러졌는데도 "훈련 계속 할래요"
아이의 이름은 김상진. 현재 밀양 동강중학교 야구부에 적을 두고 있다. 박 대표는 야구 관계자를 만나면 "현역 시절 근성 하나 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지만, 나도 혀를 내두르게 하는 친구"라고 소개한다. 첫 통화에서의 에피소드뿐 아니라 2년 동안 김 군을 지켜보면서 얻은 결론이다.
"중학생이면 친구들과 놀고도 싶고, 여자 친구도 사귀고 싶을 텐데 야구 외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요. 조금만 아프면 쉬고 싶다, 병원에 가야 한다면서 훈련장을 빠져나가는 아이들이 대부분인데 상진이는 한번도 그런 적이 없어요. 오히려 훈련 쉬라고 할까봐 아픈 것도 숨길 정도니까요."
상진이와 관련된 가장 강렬한 에피소드는 1년 전 실내연습장에서 일어났다. 실내 연습장에서 타격 연습을 하다가 6m 앞에 있던 기둥을 맞고 튕겨 나온 공에 얼굴을 맞았다. 코에서 피가 쏟아졌지만 상진이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코피를 수건으로 틀어막더니 "괜찮다"면서 다시 공을 던져 달라고 했다. 누가 봐도 괜찮지 않은 상황이었다. 부랴부랴 병원에 데려갔더니 의사가 "코뼈가 부러졌다"고 하면서 3일 뒤에 수술을 잡았다. 소년은 야구공을 손에 움켜쥐고 수술실에 들어갔다. 마취에서 깨어난 뒤에도 야구공을 제일 먼저 찾았다.
"연습하러 갈래요."
수술 다음 날 옷을 꾸역꾸역 입더니 훈련장으로 가겠다고 했다. 어머니와 박정태 대표가 극구 말렸다. 고집이 하도 세서 박 대표는 물론이고 주위에 있던 사람 모두 진땀을 뺐다.
"정말 많은 것을 느끼게 하고, 또 가르쳐 준 아이입니다. 상진이를 제 첫 번째 제자라고 하는 이유입니다."
돌아온 '탱크', 다시 한번 '레전드'를 꿈꾼다
그렇게 돌고 돌아 다시 '탱크'로 돌아왔다. 버스 기사와의 실랑이로 "교만하게 살았던"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를 얻었고, 상진이를 만난 덕분에 까맣게 잊고 살았던 야구 열정을 되살렸다.
과거만큼 화려하지는 않지만 탱크처럼 묵직한 발걸음으로 자기 앞의 험로를 개척하고 있다. 현재 밀성고등학교와 동강중학교 야구부를 지도하고 있다. 야구팀의 모토는 승부에 연연하지 않고 야구 본연의 재미와 즐거움을 깨닫자는 것이다. 소위 '작전'을 최소화하고 아이들에게 맡기는 경기를 한다. 시도해보고 싶은 것을 모두 할 수 있게 해준다. 패배에도 괘념치 않는다. "실패를 통해 오히려 더 큰 것을 터득하고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을 박 대표가 누구보다 잘 아는 까닭이다. 박 대표는 "자유분방함 속에 자율과 창의의 힘이 발휘된 것"이라고 말했다.
"야구를 인생에 비유하는 사람이 있지만, 야구가 인생일 수는 없습니다. 게임은 게임이죠. 그러나 게임을 인생처럼 하는 사람에게는 야구가 인생입니다. 저는 그것이 야구 열정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열정에 관객들이 감동하는 거죠. 협동심, 인내, 배려, 희생, 열정과 긍정 이 모든 것이 담겨 있는 '인생 야구'를 아이들과 공유하고 싶습니다. 제가 야구에 인생을 거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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