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생 다큐멘터리 감독 겸 작가 이길보라
기성세대 청년담론 '대상화' 한계?
"나이 아닌 능력" 연공제 타파해야?
"페미니즘, 모두가 평등하자는 것"?
"소수자에게 말할 권리 주는 게 정치"

이길보라 감독이 지난달 25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사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그는 소수자라 불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리는 일이 너무 즐겁다고 했다. 한국일보 기획영상팀
글을 쓰고 영화를 찍는 이길보라는 새 책에 이렇게 썼다.
"생각하고 의문을 품고 용기를 내어 말하고 선언함으로써 우리는 지형을 바꿔 나간다. 당신과 나의 말하기는 판을 바꾸고 뒤집는 일이 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당신을 이어 말한다." 마지막 문장, '당신을 이어 말한다'는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이길보라에게 말하기는 곧 정치다. 세상에 나오지 못했던 이야기를 끄집어내고, 들리지 않았던 목소리에 마이크를 쥐어주면서 연대하는 일들을 꾸준히 해왔다.
열여덟 살, 학교를 그만두고 8개월 동안 동남아시아를 여행한 후 거리에서 배운 삶의 경험을 첫 영화 '로드스쿨러'(2008)와 책 '길은 학교다'에 담았고, 농인 부모 이상국과 길경희의 일상을 그린 영화 '반짝이는 박수 소리'(2014)와 같은 이름의 책에선 농인의 시선에서 바라본 세상의 이야기를 꺼내 들려줬다.

영화 '반짝이는 박수 소리'의 한 장면. 구어보다 수어를 먼저 배운 이길보라의 손가락이다.
베트남 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건을 둘러싼 서로 다른 기억을 조명한 영화와 책 '기억의 전쟁'(2018)도 있다. 농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자식을 일컫는 '코다(CODA,Children of Deaf Adults의 약자)'의 정체성도 그 덕분에 알게 됐다.
스스로를 '이야기꾼'이라 소개하는 그는 1990년대생이나 MZ세대로 불리는 걸 거부했다. '누가 90년대생을 대표하는가', '왜 90년대생을 규정하려 드는가' 한국 사회에 불고 있는 청년 담론에는 90년대생을 누가, 왜 자꾸 불러내는지에 대한 질문이 빠져 있다는 걸 지적하면서다.
이길보라는 "90년대생의 삶은 하나의 잣대로 단순화시켜 재단할 수 없다"며 "90년대생을 규정하려 할수록, 더 알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도 했다.
그의 말대로, 90년대생은 하나로 뭉뚱그릴 수 없다. 저마다의 서사를 품고 있는 90년대생'들'이 있을 뿐. 그래서 우리는 90년대생'들'의 말하기에 주목해야 한다. 그 첫 번째는 이길보라의 말하기다.

이길보라 감독이 지난달 25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사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한국일보 기획영상팀
-한국 사회에 청년 담론이 붐이다. 본인도 딱 90년대생인데.
"한번도 나를 '90년대생 누구'라고 소개한 적이 없다. 조금만 일찍 태어났다면, 89년대생 아닌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말하는 데 나이, 세대는 중요하지 않다. 사회가 자꾸 90년대생을 묶으려는데, 그 발상 자체가 명백한 대상화라고 생각한다.
왜 윗세대는 아랫세대를 규정하지 못해 안달이 나는지 배경을 잘 살펴야 한다. 대상화를 통해 누가 목소리를 빼앗기고, 누가 더 목소리를 얻게 되고, 누가 이익을 취하고 있는지 물어야 한다.
대상화는 권력을 이미 지닌 사람들이, 권력이 없는 사람들을 알고 싶어할 때 발생한다. 물론 그들은 알고만 싶어할 뿐, 절대 마이크를 주지는 않는다. 자신들이 필요할 때만 호출하면 되니까.
지금도 90년대생을 불러서 '너희들이 가장 어리니까,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참신한 아이디어를 내봐'라고 독촉하는 거다. 대상화가 누구에게 왜 일어나고 있는지 살폈으면 한다."
"청년 담론, 대상화 넘어서야...나이가 아닌 능력으로"

4·7 재·보궐선거를 하루 앞두고 오세훈 당시 국민의힘 서울시장 후보가 서울 서대문구 신촌거리 마지막 유세장에서 한 청년의 손을 잡고 무대에 오르고 있다. 연합뉴스
이길보라는 청년 담론이 기성세대의 대상화를 넘어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2030은 이러하다'는 프레임을 만들어 가두는 게 아니라 실질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권한과 자리를 나누는 논의로 넘어가는 게 중요하다. 기준은 물론 나이가 아닌 능력. 사회를 '올드'하게 만드는 연공제 문화부터 바꿔 나가야 한다는 지적이다.
-'90년대생은 이러하다'라고 규정하는 게 문제다?
"규정하면 할수록 더 이해할 수 없고 소통할 수 없을 거다. 'K를 생각한다'의 임명묵 작가가 앞선 인터뷰(임명묵 "이준석은 2030 남성의 아바타...청년에게 위로 올라갈 기회 달라")에서 90년대생은 탈가치적이라고 평가했지만, 그렇다면 가치를 추구하는 90년대생은 90년대생이 아닌가? 만들어 놓은 프레임에 누가 들어가는지 안 들어가는지를 논하는 건 의미 없는 게임이다."
-그럼에도 특징은 있지 않나.
"좀 더 개인주의 성향을 갖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90년대생이어서가 아니라, 한국 사회 발전, 변화에 따른 거다. 내가 먼저 행복한 방향으로 살아야 우리 다 같이 살아남을 수 있겠다는 가치를 추구하려는 경향이 짙다. 집단주의와는 멀어졌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지난달 28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이한호 기자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 당선으로 청년 목소리가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 자체는 긍정적이다. 그러나 더 많은 청년들의 목소리가 정치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들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준석 대표처럼 어떤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자리까지 올라가는 것도 중요하다. 나이가 아니라 능력으로 인정받아야 하는 게 너무 당연하지 않나. 한국은 늘 모든 게 나이에 따라 올라가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다. 윗세대는 자리를 '물려줘야' 한다고 생각하고, 아래 세대는 '기다려야' 한다고 여긴다.
나이를 기준으로, 이른바 연공제에 따라 보상받고 혜택을 누리는 건 사라져야 한다. 물론 쉽지 않은 문제다. 당장 내 차례가 되기만을 기다렸는데 못 받으면 불만을 가질 테니. 그럼에도 물려주고 기다리는 건 사회를 올드하게 만들 수밖에 없다. 능력이 있다면 10대에게도 결정할 권한을 줘야 한다."
"페미니즘은 모든 평등을 지향... 인간으로서의 교양"

카라바조의 '메두사'(왼쪽)를 패러디한 힐러리 클린터 메두사. 메두사는 서구 사회에서 오랫동안 여성에 대한 혐오와 경계의 아이콘이었다. 강하고 똑똑한 여성은 남성의 우위와 통제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됐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에서도 힘을 가진 여성들에 대한 공격 수단으로 소비된다. 출처 '싸우는 여성들의 미술사 저자' 김선지 작가. 우피치 미술관, Wikimedia Commons.
최근 기승을 부리는 '안티 페미니즘'을 얘기할 때 이길보라의 목소리는 높아졌다. 페미니즘은 모든 인간이 평등하자는 건데, 어떻게 반대가 성립할 수 있는 것이냐 되물었고, 페미니즘은 여성이 모든 걸 차지하려는 게 결코 아니라는 점도 짚었다.
-2030 남성들 사이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반감이 높다.
"'안티 페미니즘'이라고들 하는데, 묻고 싶다. 페미니즘을 안티할 수 있나. 페미니즘은 여성이 모든 걸 차지하겠다는 게 아니다. 페미니즘에 대한 유구한 오해의 역사때문에 생긴 인식 같은데, 페미니즘은 남자와 여자, 다양한 성 정체성 등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걸 말한다.
이 당연한 사상에 누가 반대할 수 있나. 인간으로서의 교양 아닌가. 왜 교양을 지키지 않는 것이, 그리고 인간 존엄을 지키지 않는 것이 대세가 되고 테제가 되고 구호가 돼야 하는 건지 의문스럽다."
-2030 남성들의 목소리가 대변되지 못한다고 억울해 한다.
"안타깝지만, 2030 남성들만 억울한 건 아니다. 한국 사회 모든 사람들이 다 억울하다. 성소수자도 억울하고, 장애인도 억울하고. 한국 사회는 불공평하고 불평등하다. 그 조건을 바꾸기 어려운 상황에서 경쟁을 요구받고 끊임없이 올라가기를 강요받고 있자니 모두가 억울할 수밖에.
그 불만으로 여성들을 공격하는 것보다, 왜 우리가 억울한 감정을 평생 갖고 살아가야 하는지 같이 고민했으면 좋겠다."
"역차별? 남성 우위로 돌아가자는 거냐...'침묵 유발' 백래시 위험"

강남역 살인사건 5주기인 5월 17일 서울 강남역에서 서울여성회 회원들과 시민들이 추모 집회를 하고 있다. 뉴시스
남성들이 역차별을 받고 있다는 주장에 대해선 "기준을 따지자"고 했다. 당장 남성 우위 권력과 문화가 만연하던 불공정하고, 불평등한 사회로 되돌아가자는 건 문제다. 연장선에서 말하기를 주저하게 만드는 백래시의 위험성도 짚었다.
-남성들은 2015년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역차별당한다고 주장한다.
"역차별의 기준이 무엇인지 묻고 싶다. 비교를 하려면 기준이 있어야 하고, 그래야 차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지금 역차별이라고 말하는 건, 옛날에는 남자들이 잘 살았는데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는 거 아니냐. 남자들이 차별을 처음 경험해봐서다.
페미니즘 리부트 이전에도, 지금도 여성은 불공평한 위치에 서 있다. 어떤 사람들은 배제당하고, 어떤 사람들은 편하게 살던 때로 다시 돌아가자는 건가. 그건 온전한 기준이 아니다.
지금도 여전히 많은 남성들이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자리에 있다. 역차별이라고 볼 수 있는 통계를 가져와서 말했으면 좋겠다.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전보다 활발하니 평등하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취업이 잘 되더라도 결혼 출산 육아 등 여성이란 이유로 탈락되는 경험은 여전히 너무 많다.
우리는 더 높이, 더 멀리 가야 한다. 비교 기준을 모두가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로 잡는다면, 역차별이라는 말은 할 수 없을 거다."

페미니즘은 여성 특혜도, 남성 역차별도 아니다. 민주주의 사회의 시민적 상식이자 인권이다. 게티이미지뱅크
-백래시(Backlash)도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주저한다는게 너무 무섭다. 최근에 청소년들을 만나는 자리가 있었는데 백래시가 두려워 자신의 의견을 말하지 못하더라. 비난받고 아웃당할 것 같아서 말 자체를 못하는 거다.
모두가 항상 올바른 얘기를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저도 제가 다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길보라의 의견을 말할 뿐이다. 내 생각과 다르더라도 일단 말을 해야 풍성한 논의를 할 수 있는데, 백래시가 무서워 아무도 말하지 않게 되면,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만 과다 대표된다.
그게 담론이 되고 권력이 되고 다른 이들은 침묵하게 되는 상황이 너무 위험해 보인다."
"박성민을 향한 비난은 여성혐오...남자였다면 달랐을 것"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21일 청와대 새 청년비서관에 박성민 전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을 내정했다. 올해 25세인 박 청년비서관은 문재인 정부 들어 최연소 청와대 비서관이다. 사진은 지난해 9월 9일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발언하는 모습. 연합뉴스 자료사진
"여성혐오". 이길보라는 박성민 청와대 청년비서관을 둘러싼 공정 논란의 본질을 이렇게 규정했다. "공무원 시험도 안보고 1급 상당의 비서관이 됐다"는 류의 자격, 자질 시비는 남성이었다면 생기지 않았을 논란이란 점에서다.
앞서 그 자리에 임명됐던 여선웅(당시 36세), 김광진(당시 39세) 청년비서관 때는 아무도 문제 삼지 않았다. 그들 또한 똑같이 직업공무원이 아니었음에도. 다른 건 성별뿐이었다.
-청와대가 박성민 청년비서관을 발탁한 것을 두고 말이 많다.
"명백한 여성혐오다. 남성을 비서관으로 뽑았다면 훌륭하다고 했을 거다. 새파랗게 머리에 피도 안 마른 25세 여성이 너무 중요한 자리를 맡으니까 반발하는 거다.
자질부족? 아직 일도 안 해봤다. 내가 전쟁 영화를 만든다고 했을 때도 반응이 비슷했다. '군대도 안 갔다 온 여자애가, 어디서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젊은 애가.'
왜 못하냐. 나이, 성별을 떠나서 나는 내 위치에서 바라본 전쟁 이야기를 한 거다. 박성민 비서관 인선에 악플을 달며 여성 혐오를 쏟아낼 시간에 이 사회의 시스템을 어떻게 바꿔 나갈지 함께 고민했으면 한다."
-젠더 갈등을 좁혀갈 방법이 있을까.
"타인을 상상하려는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지금 다들 자기만 보고 있다. 나는 공부 열심히 해서 취업이 됐는데, 비정규직이라고 분노하지만 그건 여자들 때문이 아니라 자리를 주지 못하는 시스템의 문제다. 파이를 어떤 방식으로 나눌 것인지 그 고민은 타인을 상상하는 노력이 전제되지 않으면 해결할 수 없다.
젠더 갈등뿐 아니라 세대 갈등, 국경 안팎의 차별과 혐오 등 모든 갈등에도 적용된다. 우리 개인이 달라지지 않으면 시스템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이준석 공정은 프레임 안 공정, 바깥 사람들도 고민해야"

지난해 8월 인천공항공사 직원들과 취업준비생 등 청년들이 서울 중구 예금보험공사 앞에서 열린 ‘투명하고 공정한 정규직 전환 촉구 문화제’에서 졸속으로 진행된 인천공항공사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에 대해 즉각 중단을 촉구하고 있다. 뉴스1
'정의가 뒷받침된 공정.' 이길보라가 지향하는 공정의 기준이다. 그런 점에서 '동일한 출발선'만 외치는 이준석의 공정은 정의롭지도 공정하지도 않다고 꼬집었다.
-이준석 대표의 공정이 논란이다. 우리는 어떤 공정을 지향해야 하나.
"모두가 다 출발선에 서게 해 경쟁시키는 게 공정의 전부인가. 미안하지만 처음부터 그 출발선에 서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공정한 경쟁 시스템으로 선발하겠다'는 정보 자체를 제공받지 못하는 농인들은 이준석이 뭐라 하는지, 사회가 왜 지금 공정을 떠드는지 잘 모른다.
그 게임을 처음부터 못하는 사람이 있고, 그 게임을 하지 않으려 게임 밖으로 나온 사람들도 있다. 왜 우리가 모두 같은 프레임 안에 있다고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이준석 대표가 말하는 공정은 '프레임 안에만 있는 공정'이다. 프레임 밖에 있는 사람들도 같이 게임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는 게 진짜 공정과 정의라고 생각한다."
-할당제 폐지도 주장하는데
"해외 사례를 봤음 좋겠다. 여성에게 할당제를 줬을 때 사회가 얼마나 공정하고 공평하게 변할 수 있는지. 모두가 평등하게 살 수 있다는 걸, 그게 남성에게도 행복하단 걸 몸으로 겪어봐야 알 수 있다.
여성뿐 아니라 성소수자, 외국인, 이주노동자도 할당제를 통해 평등한 사회를 만들었을 때 우리 모두 조화롭게 살 수 있다. 남성 가부장제 사회가 지배했던 만큼 똑같이 해달라고 요구하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차별금지법이 시기상조? "모든 인간은 평등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

정의당 여영국 대표와 배진교 원내대표 등 정의당 의원들이 지난달 29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관 계단 앞에서 열린 차별금지법 제정 촉구 대회에서 참가자들과 '차별금지법, 이제 국회의 시간'이라는 문구로 피켓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배우한 기자
"시기상조", "사회적 합의 부족" 정치인들의 이런 말은 결국 안 하겠다는 거다. '나중'은 없다. 이길보라는 차별금지법에 대한 이준석 대표의 발언에 한마디 의미를 더 붙였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지 않다"고 얘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이다.
-국회에서 차별금지법 제정안이 논의 중이다. 이준석 대표는 "시기상조"라고 한발 물러섰는데.
"또다시 '나중에' 카드를 쓰겠다는 건데,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고 말하는 건 인간으로서의 교양이다. 차별금지법은 서로 평등하게 대하기 위해, 밀치지 말고 다 잘 살기 위해, 여기까지는 하지 말자는 약속을 법으로 만들려는 거다. 최소한의 안전망이고 테두리일 뿐이다.
이걸 미루자는 건 결국 '모든 인간은 평등하지 않다'고 얘기하는 거다. 이준석 대표가 본인의 발언이 정확하게 무슨 의미인지 알았으면 좋겠다. '나의 권리를 너한테 줄 수 없어, 왜냐면 너는 여자니까, 나랑 피부색이 다르니까, 너는 말을 못하니까'라고 말하는 거다."

'덕분에' 챌린지에서 표현된 수어는 박제된 이미지에 불과하다. '덕분에' 챌린지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진 수어는 사실 '존중한다' '존경한다'는 의미로, 아래에서 위로 끌어 올리는 동작까지 취해졌을 때 의미가 완성된다. 한국일보 기획영상팀
-책에서 '덕분에' 챌린지가 수어를 기호화했다는 지적을 했다.
"수어는 손짓, 표정까지 다 함께 하는 3차원의 움직이는 언어다. '덕분에' 챌린지는 수어를 그림으로 표현하면서 '멈춰 있는 언어'로 전락시켰다. 수어를 확산시킨 게 아니라 고정관념 안에 박제시킨 것이다.
캠페인은 전 국민적 지지를 얻었지만, 실제 농인의 삶이 개선된 건 없었다. 수어의 질도 고민해야 하는 문제다. 우리나라는 수어 통역사가 많지 않고, 수어의 질도 고르지 않다. 그럼에도 농인들은 불만을 내비칠 수조차 없다. 수어 통역을 제공받는 게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하지 못해서다."
"소수자들의 말이 들리는 시스템을 만드는 게 정치의 역할"

1일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제388회 국회(임시회) 제7차 본회의에서 소상공인 보호 및 지원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대안)에 대한 수정안이 부결되고 있다. 이한호 기자
책 '당신을 이어 말한다'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정치는 똑똑한 사람이 하는 거 아니야? 나같이 장애가 있고 못 배운 사람은 그런 거 잘 몰라." 이길보라 어머니 길경희씨의 말에, 고모는 이렇게 말한다.
"사회에서 가장 소외돼 있는 장애인, 그 중에서도 정보로부터 가장 제한된 농인이 정치를 이해할 수 있어야 진짜 정치라고 생각해." 이길보라가 생각하는 정치의 역할도 그러하다.
-대선 주자들에게 바라는 게 있다면.
"너무 많지만, 기본적으로 모든 사람이 발언할 수 있는 공론장을 만들어 나갔으면 한다.
농인 등 다양한 소수자들이 말할 권리, 그 말이 다른 사람들에게 들릴 수 있는 시스템을 같이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정치의 의미를 되새겼으면 한다. 똑똑하고 돈 많은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사회적 소수자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고, 당당하게 자신들의 필요를 요구할 수 있는 '서비스'가 정치여야 한다."
-질문의 힘을 강조했다. 한국 사회가 더 나아지기 위해 어떤 질문이 필요할까.
"열린 질문을 하는 게 중요한 것 같다. 가령 저 정치인은 정치를 잘할까, 못할까. 좋은 사람인가, 나쁜 사람인가 이렇게만 묻는다면, 답은 탈락시키거나 신봉하게 되거나 둘 중에 하나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좋은 정치인으로 성장할 수 있을까'로 질문하면, 여러 가지 고민과 대안들이 나올 수 있다."
-여의도에서 '러브콜'이 온다면, 본인이 직접 정치를 할 생각은 없나.
"제 일상에서 책을 쓰고 영화를 만드는 일을 통해 충분히 저만의 정치를 하고 있다. 조금만 유명해지면 한국 사회에서는 높은 곳으로, 중요한 곳으로 가야 한다며 여의도를 말하지만, 저는 영화감독으로서 작가로서 제 자리를 충분히 높은 곳, 중요한 곳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할 생각이다.
여의도에선 많은 것을 바꿀 수도 있지만 많은 것을 하지 못할 수도 있다."
-책 제목이 '당신도 이어 말한다'였어도 좋았겠다.
"책을 통해 하고 싶었던 말이고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제 주변에서 '우리가 이어 말한다'라는 프로젝트를 준비하는 청년들이 있다. 이준석 (대표) 같은 정치인도 아니고 유명하지도 않지만, 목소리를 내려는 청년들은 많다.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에게 펜자루를 쥐어주고, 같이 놀 수 있는 판을 짜는 역할을 모두가 고민했으면 좋겠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