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내 약국 영업 허용' 국토부 고시 이후
신설 약국 15곳 중 9곳 이상 한약사가 운영
약국과 다름없이 일반의약품 판매 논란
복지부 "한약만 팔아야" 한약사 "제한 없어"
서울 송파구에 사는 김모(38)씨는 최근 집 근처 지하철역에 있는 약국에서 일반 의약품(처방전 없이 구매할 수 있는 약품)을 사다가 당황했다. 당연히 약사인 줄 알았던 약국장의 명찰에 '한약사'라고 작은 글씨로 적혀 있었던 것이다. 김씨는 "한약사라는 직업이 있는 줄 몰랐다"며 "그간 전문성 없는 사람에게 약을 구매한 게 아닐까 싶어 걱정도 된다"고 말했다.
서울 지하철 역사를 중심으로 한약사가 운영하는 약국이 늘어나면서 이들 약국의 의약품 취급 범위를 둘러싼 논란이 일고 있다. 한약사가 한약 아닌 일반 의약품을 팔 수 있느냐가 쟁점인데, "가능하다"는 한약사 측과 "안 된다"는 보건당국 및 약사 측 입장이 엇갈린다. 소비자 사이에선 한약사는 일반 의약품을 다루기엔 전문성이 떨어진다는 의구심도 없지 않다.
지하철 약국 절반 이상이 '한약국'
2일 한국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최근 6개월간 서울 지하철 역사에 들어선 약국 중 절반은 한약사가 운영하는 약국(한약국)인 것으로 조사됐다. 해당 기간 2호선 10곳(선릉 을지로입구 잠실 건대입구 등)을 비롯해 15개 약국이 역사에 새로 문을 열었거나 개업을 준비 중인데, 이 중 최소 9곳이 한약국이다. 그간 지하철 역사는 시설 용도 확인이 어려워 약국 개설이 허용되지 않았지만, 지난해 12월 국토교통부 규정 고시로 용도 확인이 가능해지면서 약국이 빠르게 늘고 있다.
지하철 약국에 한약국 비율이 높은 것은 한약사가 현행법상 병원 처방약 조제를 할 수 없어 의약외품 등의 판매를 주로 해야 하는 만큼 유동인구가 많은 지하철역이 영업에 적합하다는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서울 송파구 지하철역에서 약국을 운영하는 한약사 A씨는 "약사는 조제를 해야 해 병원 근처에 자리를 잡지만, 한약국은 병원 처방전이 필요없다"며 "일반 상가처럼 의약품을 팔면 되니까 지하철 역사에 약국을 여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약사법 해석 두고 복지부-한약사 이견
한약국이 접근성 높은 장소인 지하철 역사에 속속 자리잡으면서 한약사가 취급할 수 있는 의약품 범위를 둘러싼 논란도 커지는 양상이다.
소관 부서인 보건복지부는 한약사가 약국을 운영하더라도 한약과 한약제제에 한해 취급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현행 법령상 약사와 한약사의 자격과 업무 영역이 구분돼 있다는 점이 주요 근거 중 하나다. 약사법에 따르면 약사는 한약을 제외한 의약품 제조와 판매, 한약으로 만든 의약품(한약제제) 취급이 가능한 데 비해, 한약사는 한약과 한약제제를 취급할 수 있다.
반면 한약사들은 약사와 한약사 모두 약국을 개설할 수 있다는 약사법 20조와 약국 개설자가 일반 의약품을 판매할 수 있도록 한 같은 법 44조를 근거로 "한약사도 일반 의약품을 판매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의약품 조제는 약사법 23조에서 약사와 한약사가 각각 면허 범위 내에서 하도록 규정된 반면, 의약품 판매에 대해선 별도 규정이 없는 만큼 한약사도 판매할 수 있다는 논리도 내세운다. 대한한약사회 관계자는 "한약사가 일반 의약품을 판매하는 것에 대한 처벌 조항도 없다"고 지적했다.
한약학과의 교육 과정이 한약 분야 위주여서 양약 분야에 대한 전문성이 부족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서울 종로구에서 약국을 운영하는 B씨는 "일반 의약품도 부작용이 있을 수 있고 함께 복용하면 안 되는 약도 있다"며 "양약을 잘 모르는 한약사가 복약지도를 잘못하면 환자가 피해를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한약사가 운영하고 있더라도 간판엔 '약국'이라고 표기하고 일반 의약품을 팔고 있어 소비자 입장에선 일반 약국과 구분하기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복지부는 한약사의 일반 의약품 판매에 대한 뚜렷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복지부 관계자는 "면허 범위 내에서 약국을 운영할 수 있지만 일반 의약품을 팔더라도 처벌 규정이 없어 고발하더라도 무혐의 처분이 나고 있다"며 "입법을 하려면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돼야 하는 만큼 이를 두고 내부 논의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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