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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모자, 앨리스, 드라큘라...우리가 사랑한 '문학 친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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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모자, 앨리스, 드라큘라...우리가 사랑한 '문학 친구들'

입력
2021.07.01 18:30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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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큘라, 앨리스, 슈퍼맨과 그 밖의 문학 친구들
알베르토 망겔? '끝내주는 괴물들'

알베르토 망겔은 '현존하는 최고의 독서가'로 손꼽히는 작가다. 현대문학 제공

알베르토 망겔은 '현존하는 최고의 독서가'로 손꼽히는 작가다. 현대문학 제공


1964년, 예순다섯 살의 보르헤스(1899~1986)는 시력을 상실해 직접 책을 읽을 수 없었다. 보르헤스는 당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피그말리온 서점에서 일하던 열여섯 살 소년에게 일이 끝난 뒤 자신의 집으로 와서 책을 읽어 달라고 부탁한다. 그렇게 소년은 4년간 세계 문학의 거장이자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장이었던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와 책을 매개로 교유하는 일생일대의 기회를 얻게 된다. 이 소년이 훗날 '언어의 파수꾼' '책의 수호자'로 불리게 되는 알베르토 망겔이다.

다섯 편의 소설과 스물두 권의 문학 선집, 스무 권의 논픽션을 발간한 작가이자 문학, 영화, 예술을 아우르는 비평가, 무엇보다 ‘현존하는 최고의 독서가’인 알베르토 망겔의 책 ‘끝내주는 괴물들’이 국내 출간됐다.

알베르토 망겔 '끝내주는 괴물들'. 김지현 옮김. 현대문학 발행. 344쪽. 1만7,000원

알베르토 망겔 '끝내주는 괴물들'. 김지현 옮김. 현대문학 발행. 344쪽. 1만7,000원


“인생을 수많은 책의 책장을 넘기는 행위로 생각했다”는 망겔에게 책 속 인물들은 단순한 ‘등장인물’이 아니라 “피와 살을 지닌 존재”다. 오랜 세월 책의 세계를 헤매온 작가는 노년에 이르러 자신의 길었던 독서 여정을 함께해온 이 가상의 친구들을 추억한다.

책은 ‘빨간 모자’부터 ‘슈퍼맨’ ‘로빈슨 크루소’ ‘돈 후안’ 등 동화에서부터 코믹북, 신화, 전설, 고전 등 다양한 작품 속 캐릭터를 주제로 한 37개의 에세이 모음집이다. 머릿속이 하나의 도서관이나 다름없을 작가답게, 짧은 글 안에서도 생각은 무한하게 뻗어나간다. 캐릭터 탄생에 얽힌 비화에서부터 재창조나 다름없는 원전의 새로운 해석, 사회 현안까지 한 바구니에 풍성하게 담겨있다.

망겔의 해석에 따르면 빨간 모자는 "개인의 자유를 상징하는 존재"다. 그림은 월터 크레인의 목판화집 '빨간 모자를 쓴 아이'(1875)

망겔의 해석에 따르면 빨간 모자는 "개인의 자유를 상징하는 존재"다. 그림은 월터 크레인의 목판화집 '빨간 모자를 쓴 아이'(1875)


예를 들어, 아프신 할머니에게 드릴 음식을 갖고 가다 숲 속에서 늑대를 만나는 동화 속 ‘빨간 모자’는 망겔의 독서를 통해 “개인의 자유를 상징하는 표상 같은 존재”로 다시 태어난다. 빨간 모자는 “독재자 같은 어머니의 명령은 따르지 않을 수 없으니 따르기는 하되, 그 과정에서 자기만의 달콤한 시간을 추구하는” ‘시민 불복종’의 신조를 형상화한 캐릭터다. 빨간 모자가 ‘탈선’하는 덕분에 숲이 살아 움직이고, 늑대와 나무꾼이 나타나고, 할머니의 낭만적인 모험도 시작됐다는 것이다. 망겔은 “빨간 모자가 탈선적 성향이 아니었더라면 이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능청스럽게 말한다.

이야기의 ‘주인공’에게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지 않는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 망겔은 햄릿보다도 그의 어머니인 거트루드에게 관심을 기울인다. 남편이 죽고 남편의 동생과 결혼하는 거트루드의 개인적 욕망은 햄릿 원작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다. 다른 이들에게 의존하고, 그들의 보조자로만 존재할 뿐이다. 망겔은 아마도 숨겨져 있을 거트루드의 “헬싱외르의 지긋지긋한 낮과 밤을 견디기 위해 발휘했던 인내심”과 “성별과 계급 때문에 주어진 부당한 처사들을 극복하기 위해 동원했던 작전들”과 “살아오면서 여러 고통스러운 일을 극복하고 거두었던 작은 승리들”까지 읽어낸다.

알베르토 망겔이 직접 그린 우리의 '문학 친구'들. 왼쪽부터 돈 후안, 앨리스, 하이디의 할아버지, 드라큘라, 홀든 코필드의 여동생 피비, 빨간 모자. 현대문학 제공

알베르토 망겔이 직접 그린 우리의 '문학 친구'들. 왼쪽부터 돈 후안, 앨리스, 하이디의 할아버지, 드라큘라, 홀든 코필드의 여동생 피비, 빨간 모자. 현대문학 제공


서양문학 작품 속 인물에만 한정되는 것도 아니다. 국내 독자들이 특히 흥미롭게 읽을 장이 바로 17세기 학자 김만중이 쓴 한국 고전소설 ‘구운몽’의 파계승 성진이다. “서양인들의 저속한 귀로 듣기에 그 선녀들의 이름은 마치 컨트리 음악 같다”는 서술에서는 웃을 수밖에 없다. 이외에도 한쪽 다리는 나무 의족에 어깨에는 앵무새를 얹고 다니는 ‘보물섬’의 해적 롱 존 실버, ‘호밀밭의 파수꾼’의 마지막 장면을 장식하는 콜필드가 4남매 중 막내이자 붉은 머리칼을 가진 열 살 소녀 피비 등, 우리가 주목하지 않았거나 스쳐 지나갔을 인물 하나하나가 책 속에서 되살아난다.

그런데 왜 ‘괴물들’일까? 망겔은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부연하는 대신 루이스 캐럴의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서 유니콘과 앨리스의 대화를 서문에 인용하는 것으로 답한다. 우리가 그들의 존재를 믿기만 한다면, 그들이 우리를 놀라운 세계로 이끌어주리라고.


“나는 어린이들이란 이야기 속에나 나오는 괴물인 줄로만 알았는데! 살아있는 거야?”
“저기요, 저는 유니콘이야말로 이야기 속에나 나오는 괴물인 줄 알았단 말이에요. 살아있는 유니콘을 보는 건 처음이에요!”
“흠, 그런데 우리가 이제 서로를 보게 됐구나. 네가 나를 믿는다면, 나도 널 믿을게. 그럼 공평하지?”

루이스 캐럴,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서




한소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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