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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독립선언을 빛낸 와인

입력
2021.07.03 10:00
수정
2021.07.03 15:34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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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와인만큼 역사와 문화가 깊이 깃든 술이 있을까요. 역사 속 와인, 와인 속 역사 이야기가 격주 토요일 <한국일보> 에 찾아옵니다. 2018년 소펙사(Sopexaㆍ프랑스 농수산공사) 소믈리에대회 어드바이저 부문 우승자인 출판사 시대의창 김성실 대표가 씁니다.

마데이라 와인은 포르투갈령 마데이라섬에서 ‘주정 강화’와 ‘열화’ 두 가지 특이한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마데이라와인협회 SNS 캡처

마데이라 와인은 포르투갈령 마데이라섬에서 ‘주정 강화’와 ‘열화’ 두 가지 특이한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마데이라와인협회 SNS 캡처

1776년 7월 4일 북아메리카의 영국 13개 식민지 대표들이 필라델피아의 한 장소에 모였다. 훗날 인디펜던스홀, 즉 미국독립기념관으로 불리는 곳이었다. 이들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저마다의 잔에 와인을 채워 건배하며 독립을 선포했다.

이날 이후 7년간 수많은 전투를 치르고 난 뒤에야 독립할 수 있었다. 13개 식민지가 하나의 깃발 아래 뭉쳐 미합중국으로 탄생한 것이다. 독립전쟁에서 ‘대륙군’ 총사령관으로 활약한 조지 워싱턴이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잔을 높이 올렸다.

독립선언서와 독립선언서에 서명하는 13개 식민지 대표들. 마데이라를 수입한 존 행콕의 서명이 가장 눈에 띈다. 서명식 그림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게티이미지뱅크

독립선언서와 독립선언서에 서명하는 13개 식민지 대표들. 마데이라를 수입한 존 행콕의 서명이 가장 눈에 띈다. 서명식 그림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게티이미지뱅크


미국 역사 변곡점에 늘 있던 '마데이라'

독립선언서 낭독 때와 조지 워싱턴의 대통령 취임식 때 축배의 잔을 채운 음료는 와인이다. 독립선언서에 가장 처음 서명한 존 핸콕이 수입한 와인으로,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과 3대 대통령이자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토머스 제퍼슨이 사랑한 마데이라 와인이었다.

마데이라는 와인 강국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에스파냐가 아닌 포르투갈 와인이다. 유럽 서쪽 끝에 자리한 포르투갈, 더 정확히 말하자면 포르투갈에서도 1,000㎞나 떨어진 대서양의 화산섬 마데이라에서 생산된다.


왜 포르투갈 와인일까

사실 이 와인은 미국 독립전쟁의 도화선이 된 보스턴 차 사건을 촉발했다. 당시 영국은 북아메리카에서 프랑스와 식민지를 놓고 7년 전쟁을 벌였다. 비록 승기는 잡았지만 엄청난 전쟁 비용 탓에 빚 또한 막대했다. 영국 의회는 재정을 메꾸기 위해 북아메리카 식민지에 설탕세에 이어 인지세까지 과도한 세금을 부과했다. 식민지 사람들의 자유를 침해하는 법까지 통과시켰다.

한편 매사추세츠의 상인 존 핸콕은 상선 리버티호로 마데이라를 수입해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 당시 포르투갈산 와인의 관세율은 프랑스산 와인의 3분의 1에 불과했다. 에스파냐 왕위계승 전쟁이 치러지는 동안, 포르투갈이 프랑스와 에스파냐 편에 서지 않는 조건으로 영국 수출품에 관세율 혜택을 받는 메투엔 조약을 맺은 덕분이었다. 핸콕으로서는 이문 많은 포르투갈 와인을 수입하지 않을 까닭이 없었다.

그러던 차에 영국 세관 관리들이 핸콕에게 밀수를 했다며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핸콕이 보스턴 항에 정박한 리버티호에서 마데이라를 밤에 몰래 하역했다는 것이다. 영국 정부는 전함 롬니를 보내 리버티호를 압류한 뒤 해군에 넘겼다. 그러잖아도 영국에 불만이 많았던 보스턴 사람들은 억류된 리버티호에 불을 질러버렸다. 곧 보스턴 학살 사건에 이어 기어이 보스턴 차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사실 핸콕은 뼛속까지 자본가이자 친영국파였다. 그러나 그는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서 급진적인 분리독립주의자가 됐다. 독립선언서에 가장 먼저 서명했을 뿐만 아니라, 가장 눈에 띄게 서명한 까닭에 ‘존 핸콕’이라는 명칭이 ‘자필 서명’을 뜻하게 되었을 정도이니 말이다. 그러고 보면, 마데이라는 미국 역사의 변곡점마다 건국의 주역들과 자리를 함께한 셈이다.

마데이라섬의 포도밭 전경. 화산섬에 가파른 산악지대라 현무암으로 계단식 포도밭을 만들어 포도나무를 재배한다. 포이오스 방식(테라스형 방식)이라 한다. 게티이미지뱅크

마데이라섬의 포도밭 전경. 화산섬에 가파른 산악지대라 현무암으로 계단식 포도밭을 만들어 포도나무를 재배한다. 포이오스 방식(테라스형 방식)이라 한다. 게티이미지뱅크


주정 강화·열화, 마데이라의 정수

마데이라는 주정 강화 와인이다. 말 그대로 와인에 주정(중성 증류주)을 강화하여 알코올 도수를 높인 와인이다. 포르투갈의 포트, 에스파냐의 셰리와 더불어 마데이라를 세계 3대 주정 강화 와인이라 한다.

포트 와인은 발효하는 중에 주정을 첨가해 발효를 중지시켜 만든다. 당분이 알코올로 완전히 전환되지 않고 남아 맛이 달콤하다. 셰리는 발효를 마친 뒤 주정을 첨가해 달지 않고 드라이하다. 마데이라는 포트처럼 발효하는 중에 96도의 주정을 첨가하지만 ‘열화’라는 특이한 과정을 거친다. ‘주정 강화’와 ‘열화’, 이 두 가지 독특한 양조법 덕분에 최고의 숙성 잠재력과 보존력을 자랑한다.

15세기 초반, 포르투갈은 대서양에 진출했다. 그때 처음 개척한 섬이 마데이라다. 모로코로부터 640㎞, 포르투갈에서 1,000㎞나 떨어진 무인도 마데이라는 ‘나무 또는 삼림’이라는 뜻의 이름처럼 숲이 울창했다. 농토를 확보하려고 섬에 불을 질렀는데 몇 년 동안 불이 꺼지지 않았을 정도였다. 숯이 거름이 되었는지 사탕수수 농사가 잘되어 포르투갈에 큰 수익을 안겼다. 하지만 브라질과 카리브해의 여러 섬에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이 생기자 마데이라에는 포도나무를 심어 와인을 만들었다고 한다.

마데이라 와인을 칸테이로 방식으로 열화 숙성시키고 있다. 마데이라와인협회 SNS 캡처

마데이라 와인을 칸테이로 방식으로 열화 숙성시키고 있다. 마데이라와인협회 SNS 캡처

마데이라섬은 경사가 가파른 산악지대인 데다가 남쪽 면과 북쪽 면, 고도에 따라 미세 기후가 확연히 다르다. 안개가 자주 끼어 습도도 높다. 위치에 따라 재배되는 품종도 다르고 포도나무 재배방식과 수확 시기도 다를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사람이 일일이 수작업으로 농사를 지어야 한다. 농부들은 ‘포이오스’라는 계단식 밭을 만들고 ‘레바다’라는 물길을 냈다. 습기로 인한 곰팡이성 질병을 예방하기 위해 공기가 잘 통하는 ‘라타다’ 방식으로 포도나무를 높게 올려 재배했다. 이러한 악조건을 뚫고 처음에는 화이트 와인을 생산했다.

섬이 개발되자 신대륙으로 진출하려는 열강들은 마데이라를 기항지로 삼았다. 인도나 아메리카로 가는 배들이 이곳에 들러 식량과 식수, 와인을 보충했다. 문제는 와인이었다. 긴 항해에 상하지 않고 견딜 와인이 필요했다. 그때부터 와인에 주정을 강화했다고 한다.


상했다고? 전화위복의 마법

선원들에게 와인은 고되고 두려우며 외로운 바다 생활을 견디게 하는 피로해소제이자 각성제이고 수분보충제이자 치료제였다. 게다가 무거운 와인 통이 배 밑바닥에 적재되어 배의 균형도 잡아주니, 이래저래 와인은 항해 필수품이었다.

17세기 중반의 어느 날, 인도로 간 배가 무슨 이유였는지 와인을 그대로 싣고 돌아온 일이 있었다. 와인은 색과 향, 맛이 모두 변해버렸다. 적도를 지나는 동안 뜨거운 열과 진동에 노출된 와인이 산화되고 열화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상한 줄 알았던 와인이 복합적인 풍미가 더해져 더 맛있어진 게 아닌가.

사람들은 열화되어 되돌아온 와인을 ‘일주여행와인(Vinho da Roda)’이라 부르며 그 맛에 열광했다. 그렇다고 이 와인을 만들자고 매번 적도를 넘나들 수는 없는 법. 다른 방법을 고안해야 했다. 에스투파젬(Estufagem) 방식과 칸테이로(Canteiro) 방식이 그것이다.

에스투파젬은 18세기 후반에 고안된 방식이다. 스테인리스스틸 탱크나 콘크리트 탱크에 구리코일을 감아 45~50도의 온수를 흘려보내 90일 이상 와인을 덥혀 열화한다. 와인을 식혀 안정화한 다음 큰 통에서 3년 이상 추가 숙성한다. 이 방식에는 적포도 품종인 ‘틴타 네그라 (몰레)’가 주로 사용된다. 과육의 즙으로만 화이트와인으로 양조해 드라이에서 스위트까지 다양한 스타일로 만든다. 이 방식은 주로 대중적인 마데이라에 사용한다.

1875년 올드빈티지 마데이라 와인. 마데이라는 ‘주정강화’와 ‘열화’를 시킨 와인으로 최고의 숙성잠재력과 보존력을 자랑한다. 마데이라와인협회 SNS 캡처

1875년 올드빈티지 마데이라 와인. 마데이라는 ‘주정강화’와 ‘열화’를 시킨 와인으로 최고의 숙성잠재력과 보존력을 자랑한다. 마데이라와인협회 SNS 캡처


열 받고 식고... 다락 숙성으로 태어나다

칸테이로는 전통 방식이다. 와인을 담은 나무통을 태양열을 받아 20~35도를 유지하는 3개 층으로 된 다락에서 숙성시킨다. 처음에는 온도가 높은 최상층에서 최소 2년간 숙성한다. 낮에는 뜨거운 열기를 받고 밤에는 식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와인이 서서히 증발 농축된다. 이 과정에서 와인은 말린 과일, 견과류, 열대과일, 캐러멜, 초콜릿, 허브, 꿀 등의 향에 스파이시한 향이 더해져 더 깊고 강렬한 향을 품게 된다. 이렇게 숙성한 통을 한층 아래로 내려 추가 숙성하고 다시 또 한층 내려 숙성하는 방법이다. 이 방식은 블렌디드 고급 마데이라와 빈티지를 표기하는 고급 마데이라에 사용한다. ‘칸테이로’는 오크통을 쌓아놓은 나무 선반을 뜻한다.

블렌디드 마데이라는 (단일 품종 또는 여러 품종으로 빚은) 여러 해의 와인을 섞어 만든다. 5년, 10년, 15년, 20년, 30년, 40년, 50년, 50년 이상으로 숙성 연령을 표시한다. 숙성 연령 5년은 리저브(올드), 10년은 올드 리저브(스페셜 리저브 또는 베리 올드), 15년 이상은 엑스트라 리저브라 칭한다.

빈티지를 표기하는 마데이라는 ‘데이티드 마데이라(dated Madeira)’라고도 부른다. 이 중 콜헤이타(Colheita)는 5년 이상, 프라스케이라(Frasqueira) 또는 가라페이라(Garrafeira)는 20년 이상 배럴 숙성한 와인이다. 콜헤이타는 단일 품종 또는 여러 품종을 섞어 만들고, 프라스케이라와 가라페이라는 단일 품종으로 만든다.


달콤새콤한 독특한 와인

마데이라에 사용하는 품종은 틴타 네그라만 빼면 모두 청포도이다. 특이하게도 품종에 따라 와인 스타일이 정해진다. 세르시알은 드라이, 베르델료는 미디움 드라이, 테란테즈는 미디움 드라이 또는 미디움 스위트, 부알(또는 보알)은 미디움 스위트, 맘지(또는 말바지아)는 스위트 마데이라에 사용한다. 틴타 네그라는 드라이에서 스위트까지 다양한 스타일로 만든다. 레이블에 포도 품종을 표기하려면 그 품종을 최소 85% 이상 사용해야 한다.

얼마 전 여러 스타일의 마데이라를 시음해보고 깜짝 놀랐다. 깊고 강렬한 풍미에 특히 산도가 높아 청량하고 당도와의 밸런스도 훌륭했기 때문이다. 사실 달콤한 와인일수록 산도가 받쳐주지 않으면 와인에 생기가 없고 느끼한 까닭에 금세 질린다.


차게 온더록스로 마시고 병 세워서 보관

마데이라는 차게 마셔야 더 맛있다. 온더록스로 즐겨도 좋다. 식전주나 식후주로 그냥 즐겨도 충분히 맛있지만, 요리에 곁들여 마시면 더 맛있다. 마데이라협회에서 제안한 와인과 요리의 마리아주를 참고하여 시도해봤다. 드라이하고 청량한 세르시알과는 훈제 연어를, 좀 더 부드럽고 고소하며 달콤한 베르델료와는 족발을 먹어보았다. 잘 어울렸다. 더 달콤하지만 복합적인 풍미의 보알과는 꿀과 견과류를 얹은 구운 브리치즈와 고르곤졸라 피자를, 진한 풍미만큼이나 스위트한 맘지와는 크렘 브륄레와 꿀 땅콩과 함께 먹어봤는데 이 또한 무척 잘 어울렸다. 시도해 보지는 않았지만 마니아들은 마데이라는 시가와 가장 잘 어울린다고 한다.

마데이라는 병을 세워서 보관해야 한다. 산도가 높아 마개가 부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오픈한 와인도 비교적 오래 두고 마실 수 있기에 마개 형태도 일반 와인과 다르다.


제주와 자매결연한 마데이라

마데이라섬은 15년 전 제주도와 자매결연을 했다. 한동안 격조하다 5월부터 온라인 교류를 재개했다. 게다가 마데이라는 국내에 대부분 수입된다고 하니, 직접 현지에 가지 않더라도 랜선으로 풍광을 즐기며 마데이라의 맛과 향을 음미해볼 수 있다.

아 참, 마데이라는 축구 선수 호날두의 고향이기도 하다. 몇 해 전 그의 이름을 따 공항 이름도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공항(Cristiano Ronaldo airport)으로 바꾸었단다.

와인 시음 용어 중에 ‘마데라이즈드(Maderized)’가 있다. 마데이라에서 온 말이다. 와인이 열화되고 산화되어 ‘결함 있는 향’이 날 때 이 표현을 쓴다. 마데이라 와인은 ‘일부러’ 그렇게 만들었으니, 통념을 깨트린 역발상 와인이 아닌가.

시대의창 대표ㆍ와인 어드바이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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