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지난해 7월 전국 73개 국가하천(3,600㎞) 배수시설에 자동·원격제어시스템과 24시간 모니터링 체계를 2022년까지 구축하겠다고 발표했다. 주민이나 공무원이 수동으로 배수문을 조작하던 것을 사물인터넷(IoT)과 인공지능(AI) 등 4차 산업 기술을 적용, 실시간 수위를 측정해 수문을 자동 또는 원격 제어하는 방식으로 전환하는 것이 핵심이다. 국토교통부는 이를 기반으로 한 '국가하천 스마트 홍수관리시스템 구축 설치 가이드라인 및 운영 매뉴얼'까지 내놓았다. '더 안전한 하천'을 위한 다짐이었지만, 광주광역시에서는 정부의 이 다짐이 딴 세상의 이야기였다.
6일 광주시 등에 따르면 시는 국가하천 스마트 홍수관리시스템 구축 사업을 추진하면서 실시설계용역을 하도급받은 업체가 AI 기술을 적용한 용역 결과를 내놓자 '(이보다 낮은) 3차 산업 기술로 다시 설계하라'고 지시했다.
해당 업체 관계자는 "'시대 흐름에 역행하는 후진 기술을 쓸 수 없다'고 버티자 원청업체를 통해 계약 해지통보를 받았다"고 말했다. 해당 사업은 광주시가 국비(25억 원)를 받아 진행하는 사업이다.
시가 A사와 스마트 홍수관리시스템 실시설계 용역 계약을 한 건 지난해 11월. 영산강, 황룡강, 광주천, 지석천 내 53개 수문을 원격으로 열고 닫을 수 있게 원격단말장치와 수위계, 폐쇄회로(CC)TV 등 관련 설비 설치가 골자다. 시는 과업지시서를 통해 "국토부 가이드라인을 준수하고 가능한 한 최신 기술을 반영해 설계하라"고 요구했다. 관련 설비도 우수조달제품으로 구매하도록 했다.
그러나 설계 능력이 떨어진 A사는 B사에 하도급을 줬다. B사는 광주시, 익산지방국토관리청 등과 협의를 거쳐 올해 1월 말 핵심 설비인 원격단말장치에 임베디드(반도체에 내장돼 기계를 제어하는 소프트웨어) 기술을 반영키로 결정했다. 빅데이터와 사물인터넷, AI 기반의 진단 기능이 탑재된 원격단말장치를 통해 수문 개폐에 대한 의사 결정과 실행을 자동화하겠다는 것이었다. B사는 이 과정에서 자사의 원격단말장치를 쓰도록 설계했다. 임베디드 방식 원격단말장치 중 국내 유일 우수조달제품으로, 기상예보와 유속 등에 대한 분석을 통한 사전 대응 등 지능형 자율 운영이 가능하다.
하지만 시는 2월 초 B사의 설계 완료 보고를 받은 직후 관리자가 직접 수문 상태와 하천 수위를 모니터 화면에서 비교·분석해 원격 제어하는 PLC(Programmable Logic Controller) 기반의 원격단말장치로 설계를 바꾸라고 요구했다. 또 B사 원격단말장치로 특정된 제품 사양도 설계에서 빼도록 했다. PLC 방식은 임베디드 기술보다 한 단계 낮은 기술로 평가된다.
B사는 "부당한 지시를 철회하라"고 반발했다. 이에 A사는 4월 말 B사와 하도급 계약을 해지하고 5월 중순 PLC 방식의 원격단말장치를 사용하는 것으로 설계를 바꿨다. 그러자 시는 지난달 23일 C사와 19억여 원에 PLC 기반 원격감시제어설비 구매·설치 공사 계약을 했다. PLC 기반 원격단말장치 생산업체를 밀어주기 위해 시가 설계 변경을 요구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는 배경이다.
이에 대해 시 관계자는 "PLC 방식 원격단말장치는 임베디드 방식보다 성능이 떨어지고, 이 때문에 임베디드 방식 제품으로 설계·구매 발주를 하면 PLC 제품 생산업체는 아예 경쟁입찰에 들어올 수가 없다"며 "PLC 제품 사양으로 설계해서 임베디드 제품 생산업체도 입찰에 들어올 수 있게 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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