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2000년대 중반에 서귀포시에서 병원을 운영했는데 상당히 잘 됐어요. 세상의 꼭대기에 올라간 것 같았어요. 그런데 그때 큰아이에게 정신질환이 생긴 거예요. 믿어지지 않았죠. 병원들을 찾아다녔지만 환자들이 믿고 따를 정보를 얻기가 어려웠어요. 의사들은 속시원히 알려주지 않았고 그때만 해도 정신질환 보호자들을 위한 지침서가 전혀 없었거든요. 밤마다 내가 뭘 잘못했길래 우리 아이가 이렇게 됐을까 온갖 생각이 났어요. 그러다 해외에서 당사자와 가족을 위한 안내서를 구했는데 기가 막힌 거예요. 궁금한 내용이 다 들어 있었어요. 그래서 그 책을 번역해서 국내에 출판하기로 결심했죠.
강병철 꿈꿀자유 출판사 대표
강 대표가 직접 번역하고 지인의 출판사를 통해서 세상에 내놓은 책, ‘사랑하는 사람이 정신질환을 앓고 있을 때’는 강 대표의 말을 빌리자면 ‘폭망했다’. 국내 출판시장에는 하루에도 수백 권의 새 책이 쏟아진다. 좋은 책이라고 잘 팔린다는 보장이 없다. 강 대표는 지인에게 미안한 나머지 이럴 바에야 직접 출판사를 차리자고 결심했다. 그는 꿈꿀자유를 설립한 2013년부터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고집스럽게 의학 서적을 번역하고 출판해 왔다. 이달에는 864쪽에 이르는 역작 ‘자폐의 거의 모든 역사’를 내놨다. 지난 21일 캐나다에 거주하는 강 대표에게 그가 사비를 털어서 출판사를 운영해 온 이유가 무엇인지 전화로 들어봤다.
환자용 책 외면하는 출판업계
꿈꿀자유는 환자와 그 가족들에게 질병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책들을 주로 내 왔다. 돈은 안 되지만 세상에 꼭 필요한 책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강 대표는 출판사를 차리기 이전에 해외 서적들을 들고 국내 출판사들을 찾아다녔지만 나날이 쪼그라드는 출판 시장에서 그런 일을 하겠다고 나서는 회사가 없었다고 털어놨다. 꼭 필요한 지식인데 국내에 전달할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 누구라도 한 명은 나서야 했다는 이야기다.
“제가 개원의 생활을 할 때 인기가 많았어요. 환자를 붙잡고 끝까지 설명해 주고 기억 못하면 다음에 또 해 줬어요. 어떤 병이든 의사가 환자에게 30분이고 1시간이고 설명할 시간이 있으면 사람들이 그렇게 고통받지 않을 거예요. 그런데 한국에서는 의료에 비용을 적게 들이는 대신 ‘3분 진료’를 하는 상황이죠. 큰애가 정신질환을 앓아서 병원에 다닐 때 어디에서도 속시원하게 정보를 알려주지 않았어요. 그렇다면 책이라도 있어야겠다고 생각한 거예요.”
차려보니 출판사 현실 이해해
그러나 작은 출판사를 운영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독자에게 책을 알리기도 어려웠다. 아내는 딱 1억 원만 투자해 보라고 조언했고 그 돈은 7년 만에 바닥났다. “희귀병 전문서적을 내자는 마음은 지금도 가지고 있지만요, 그렇게만 해서는 출판사를 유지할 수가 없어요. 1억 원을 까먹으면 출판 사업을 그만두겠다고 아내와 약속했는데 7년 만에 돈이 똑 떨어졌어요. 그게 작년입니다.”
그래도 책을 내는 이유는
그럼에도 좋은 책을 낸다면 세상이 알아주리라고 강 대표는 믿는다. 꿈꿀자유가 2017년 번역해 출판한 ‘인수공통 모든 전염병의 열쇠’가 그랬다.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앞에서 한국 의료체계가 망가지는 현실을 보고 펴냈던 책은 지난해부터 시작된 새로운 감염병의 유행을 계기로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그 전까지 판매한 부수의 3배를 팔았다. 잘 만든 책 한 권이 출판사를 구했다. “서양에는 감염병에 대한 책이 무수히 나와 있었는데 국내 출판사들은 출판할 것 같지 않았어요. 1인 출판사를 하는 주제에 꿈은 커서 사회에 문제가 있으면 출판계가 답을 내놔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믿을 수 없는 의학서가 너무 많다
강 대표는 누군가 믿을 수 없는 책은 골라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가 보기에는 의학서적이라고 보기 어려운 책들이 많기 때문이다. 정신질환이 부모의 양육방식 때문에 발생한다고 단정하거나 약물의 효과를 부정하는 책이 대표적이다. 강 대표는 “세계적 전문가들이 쓴 정신질환 서적은 1,000권도 안 팔리지만 ‘약 안 쓰고 아이 키우기’류의 책은 10만 권씩 팔린다”면서 “보건복지부에 권장도서만 발표할 것이 아니라 어떤 도서는 피하라고 국민들에게 알려줘야 한다고 이야기했는데 안 통하네요”라고 아쉬워했다. 그는 피해자가 나타나길 기다릴 것이 아니라 정부는 물론이고 대한의사협회나 언론이 적극적으로 나쁜 정보를 가려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풀뿌리 모금으로 다운증후군 서적 준비
출판시장이 쪼그라드는 만큼 지식을 전달할 길도 좁아진다. 그 길을 넓히려면 정부나 사회의 투자가 절실하지만 강 대표가 보기에 한국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강 대표는 “보건복지부에서 좋은 건강서적을 만들었다고 상을 하나 받았었는데 상패만 주더라고요. 상 받았다는 걸 알리려면 책에다가 스티커를 붙이는 돈이 또 들어가는 거죠. 돈을 써야 진흥이 되는 건데 한국에서는 출판지원금 이런 게 거의 없습니다”라고 설명했다.
강 대표는 풀뿌리 출판운동에 희망을 건다. 지식이 필요한 사람들이 조금씩 돈을 모아서 책을 내자는 이야기다. 현재는 다운증후군을 앓는 당사자와 가족을 위한 책을 준비하고 있다. 네이버 카페 ‘꿈꿀자유서울의학서적’을 통해서 현재까지 60여 명이 모금에 참여했다. “천천히 모금하고 있지만 사람이 안 모여도 책은 낼 겁니다. 누군가는 미친 짓을 하고 있다고도 하지만 다운증후군에 관한 책은 드물거든요. 제가 책을 내야죠. 독자들께서도 어려움이 있으시면 책을 읽으세요. 책 속에 길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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