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 서류 발견자, BBC 방송에 익명으로 전달
英해군함의 러시아 접근 시 예상 반응 등 담겨
미군 아프간 철수 후 영국군 잔류 여부도 포함
지난 22일(현지시간) 영국 남동부 켄트주(州)의 한 버스 정류장. 비에 흠뻑 젖어 있는 채로 정류장 뒤편에 놓여 있던 문서 꾸러미 하나가 한 시민의 눈에 들어왔다. 약 50장 분량의 서류에는 민감한 군사 정보 등이 가득한 이메일, 파워포인트 발표 자료 등이 담겨 있었다. 문건을 주운 시민은 고민 끝에 익명으로 영국 공영 BBC방송에 이를 전달했다.
27일 BBC가 보도한 내용은 서류에 붙은 ‘영국 정부 기밀 문건’이란 표식만큼이나 충격적이었다. 영국 미사일 구축함 ‘HMS디펜더호’가 흑해의 크림반도에 접근했을 때 예상되는 러시아 측 반응 등이 기재돼 있었던 것이다. 방송은 “국방부가 ‘우크라이나 영해를 무해통항(無害通航·외국 선박의 항행이 연안국 안전 등에 해가 되지 않는 한 영해를 자유롭게 항행할 수 있는 것)한다’고 표현한 임무는 총을 덮고 함정 헬기를 격납고에 보관한 상태로 수행됐다”며 “러시아가 공격적으로 대응할 것으로 예상했음을 보여준다”고 분석했다.
실제 문건 발견 다음 날인 23일, 흑해에서 영국과 러시아 해군은 신경전을 벌였다. 당시 러시아 국방부는 “디펜더호가 국경을 넘어 자국 영해로 이동했다”며 경비함이 경고 사격을 했고 제트기도 항로에 폭탄을 투하했다고 밝혔다. 반면 영국 국방부는 “해군 함정이 국제법을 준수하며 우크라이나 영해를 무해통항 중이었다”고 주장했다. 또 러시아 측이 어떤 형태의 경고 사격도 하지 않았다고 선을 그었다.
그러나 BBC가 확보한 문건에 따르면, 영국 국방부는 러시아가 디펜더호의 흑해 항해를 민감하게 받아들일 가능성을 사전에 인지·대비하고 있던 셈이 된다. 마리아 자하로바 러시아 외무부 대변인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텔레그램에 “영국 정부가 최근 도발을 은폐하려고 많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며 “007이 예전 같지 않다”고 비아냥댔다.
문서에는 또 △미군 주도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군대가 철수한 뒤 영국군의 아프가니스탄 주둔 가능성 △무기 수출 캠페인 등 영국이 유럽 동맹국과 경쟁할 수 있는 분야 등의 내용도 포함된 것으로 전해졌다. BBC는 “해당 문서는 (미군의 아프간) 철수 완료 시 영국군 특수부대의 해당 지역 잔류 문제도 다뤘다”며 “영국 정부는 일부 부대를 남겨두는 걸 고려 중”이라고 전했다. 방송은 다만 문건의 민감성을 고려, 관련 인사들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세부 사항은 보도하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BBC는 문제의 서류가 영국 국방부 고위 관계자 사무실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했다. 국방부 역시 내부 문서가 맞다고 시인했다. “지난주 한 직원이 내부 문서 분실 사실을 신고했고, 정확한 경위를 조사 중”이라는 게 국방부의 설명이다. 영국 정치권과 시민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야당인 노동당의 존 힐리 예비내각 국방장관은 “매우 당황스러운 일”이라며 “기밀 문서가 어떻게 국방부에서 유출됐고, 이 같은 방식으로 알려졌는지 신속히 확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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