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HRW)가 한국만 '콕' 집어 불법촬영(몰카) 피해 실태를 조사한 뒤 보고서를 내 화제였다. 탁상시계에다 몰카를 숨겨 선물한 직장상사의 사례, 화장실에 갈 때마다 몰카 구멍이 있나 없나 확인하고서야 겨우 안심하는 한국 여성들의 실태 등이 고스란히 공개되면서 한국은 졸지에 '세계 몰카의 중심지'라며 망신을 당했다.
이는 괜한 억지가 아니다. 최근에만 해도 차 운전석 밑에 초소형카메라를 숨기고 여자 수강생들의 치마 속을 찍은 운전연수 강사가 구속됐다. 인터넷을 조금만 검색해봐도 인형에 숨긴 몰카 등 이런저런 몰카 제품들이 쏟아진다. 심지어 인터넷 커뮤니티에선 '모텔에 들어 갔을 때 이런 액자가 있으면 틀림없이 몰래카메라가 숨겨져 있으니 반드시 피해야 한다'는 정보까지 공유된다. 청와대 국민청원에는 초소형카메라 판매를 금지해달라는 요청도 등장했다.
23일 국회 등에 따르면 그간 몰카 단속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융합산업 발전' '신기술 육성' 논리에 밀려 무산됐다. 유통 관리 체계만이라도 바로잡아보자는 제안이 나오고 있지만, 이 또한 산업 진흥 논리에 묻힐 가능성이 크다.
'몰카와의 전쟁', 4년 전 시작됐다
"몰카 범죄가 더 창궐하기 전에 제지해야 할 때다."
지금으로부터 4년 전인 2017년 9월, 당시 국무총리였던 이낙연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국정현안점검조정회의에서 단호하게 선언했다.
'리벤지 포르노(보복성 음란물)'가 심각한 사회 문제로 부상하자 정부는 '디지털 성범죄 피해 방지 종합대책'을 내놨다. 말하자면 '몰카와의 전쟁' 선포였는데, 당시 정부가 주목한 것은 펜이나 시계 모습을 하고 있는 몰래카메라였다. 정부는 이를 '변형카메라'라고 부르면서 이 제품을 수입, 판매하는 사람은 모두 정부에 등록하게 하고, 이 제품을 사는 사람들의 정보도 기록해 유통 이력을 추적하겠다고 밝혔다.
다음 해 8월 이를 위한 '변형카메라관리법'이 발의됐으나 좌초됐다. 드론, 자율주행차, 로봇청소기 같은 제품에도 카메라가 장착되는 시대에 변형카메라가 무엇인지 정의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과도한 규제 때문에 차세대 기술과 신제품 개발에 장애가 되리란 반대론이 힘을 얻었다. 몰카와의 전쟁을 선포했던 정부도 여기에 동의했다.
그 뒤 몰카 문제는 잊혔고, 그 사이 카메라 디지털성범죄는 2011년 1,523건(수사 건수 기준)에서 2019년 5,762건으로 4배 가까이로 늘었다.
'훔쳐 보는 2㎜의 시선'… 더 교묘하게 숨긴다
하지만 초소형카메라 기술은 계속 발전을 거듭했다. 투박해서 쉽게 눈에 띄던 렌즈 크기는 최근 들어 지름이 2㎜까지 줄어들었다. 피하는 것도, 적발하는 것도 쉽지 않은 수준이 됐다. 이 때문에 몰래카메라 문제를 해결하려면 이 변형카메라들의 유통 자체를 관리해야 한다는 주장이 다시 힘을 얻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지난 3월 새 '변형카메라관리법'이 발의됐다. 변형카메라 수입, 판매, 유통을 기록토록 하되, 주행이나 방범 등 목적이나 용처가 분명한 생활이나 산업용 카메라는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변형카메라심의위원회'를 구성, 기술 발달로 판단하기 애매한 카메라가 생겨날 경우 변형카메라에 해당하는지 여부를 판단토록 했다.
반론은 여전히 거세다. IT 업계 관계자는 "다양한 형태의 수많은 카메라들이 있는데 이를 일일이 심의해 법 적용 대상인지 아닌지 지정할 수 있겠느냐"며 "변형카메라를 다루는 이들 대부분이 소상인들인데 법에 따라 등록할지도 의문"이라고 말했다.
정부도 신중하다. 몰카 피해자 지원 업무를 맡고 있는 여성가족부는 새 변형카메라관리법에 적극적이다. 하지만 주무부처인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범죄 예방을 위한 사전적 규제가 필요하다"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기술과 산업 진흥 측면 문제도 함께 살펴야 해서 다양한 의견을 들어봐야 할 것 같다"는 유보적 입장을 내놨다.
변형카메라관리법을 발의했던 진선미 의원실 관계자는 "변형카메라를 '등록'하라는 것일 뿐 취급 자체를 막는 게 아니기 때문에 산업 육성에 저해되지 않는다고 본다"며 "우려되는 부분은 시행령으로 바로잡으면 될 일"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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