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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의 자산, 천국의 자산

입력
2021.06.23 04:30
수정
2021.12.21 09:44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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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개발로 철거를 앞두고 있는 경기 광명시 철산3동 쪽방촌. 남보라 기자

재개발로 철거를 앞두고 있는 경기 광명시 철산3동 쪽방촌. 남보라 기자

조세희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 철거예정지의 ‘김불이 가족’은 조각마루가 있는 무허가 집, 막내딸 영희가 연주하던 줄 끊어진 기타, 그리고 마당가 팬지꽃 정도의 ‘자산’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지옥에 살면서 날마다 천국을 생각했다’는 이 가족의 자산은 ‘천국에 사는 사람들’이 보기엔 한 줌 쥐어서 내버려도 별로 죄책감도 들지 않을 정도일 거다. 그래서인지 신도시나 재개발의 형태에는 낡은 집을 살기 좋게 개보수하고 밝은 페인트칠을 하고, 팬지꽃을 더 심어주는 방식은 없다. 모두 밀어내고 브랜드 아파트를 세우는 방식뿐.

무허가 집과 팬지꽃이 100만 원 정도의 자산이라면, 대신 아파트를 세워서 1억 원의 부를 창출하는 게 설득력은 있어 보인다. 그러나 10억 원을 가진 사람의 1억 원과 500만 원을 가진 사람의 100만 원이 갈등할 때라면 어떤가. ‘존재의 안위’와 직결된, 반드시 지켜내야 할 돈은 빈자(貧者)의 100만 원이 아닐까.

우리 부(어젠다기획부)에서는 최근 ‘21세기 난쏘공’ 기획을 하면서 지금도 지옥에서 사는 사람들을 만났다. 브랜드 아파트에 터전을 내주고 떠나야 하는 사람들의 자산은 이렇다.

50년 넘게 경기 광명에서 살아온 김선이(가명·79) 할머니의 반지하 전셋집(보증금 2,000만 원, 월세 15만 원). 박희석(가명·78) 할아버지의 2,500만 원짜리 반지하 전세방. 신길선(가명·89) 할머니의 전세 500만 원짜리 무허가 쪽방. 신 할머니의 말처럼 “죽는 것도 어렵고, 사는 것도 어려운” 중간의 어딘가에 삶은 놓여 있다.

영세가옥주도 생이 추락하기는 마찬가지다. 추가 분담금을 낼 여력이 없어 입주권을 헐값에 팔고 다른 곳에서 세입자가 된다. 상인은 어떤가. 막대한 권리금을 회수하지 못하고 밀려나면서도 하소연할 곳이 없다. 신도시와 재개발에 대해 “저소득층의 하나 남은 자산마저도 빼앗아 부유층에 쥐어주는 것”이라는 누군가의 한탄은 틀린 것이 하나 없다.

국가라는 것이 다수의 표만 좇는 약육강식의 추종자가 아니라 공공선에 대한 일말의 책임을 가지고 있다면, 이 지옥과 천국의 간극을 좁히기 위해 무엇인가를 하고 있어야 옳다. 영국처럼 세입자도 재개발 주민투표에 참여하게 한다거나, 미국처럼 동등한 대체주택을 제공하게 한다거나, 아니면 사실상 10년 이상을 살아야만 재개발 지역 세입자로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현행 우리 제도의 허점이라도 고친다거나. 그러나 아무것도 없다.

정작 정치권이 매달리는 건 재산세, 종합부동산세, 양도세 인하이다. 모두 유주택자들을 위한 제도다. 난 종부세 인하 등의 ‘찬반’ 여부에 별 관심이 없다. 다만 중상위층의 자산 이익에 관계된다는 이유로 쉽게 정책의 중심 테이블을 차지하는 그 권력이 부럽고, 동시에 쓰릴 뿐이다. ‘천국에 살기 때문에 지옥을 생각할 필요가 없는 이들’은 어느 곳에나 득세하고, 정부와 국회는 그 핵심이다.

재개발 지역 세입자들의 사연을 썼던 후배가 “감성팔이 기사”라는 댓글에 속상해했다. 제도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피해자가 처지를 호소할 때 ‘떼쓴다’ ‘감성팔이’라는 모욕이 날아든다. ‘이성적으로 보일 수 있는 여유’ 또한 제도를 자기편으로 만든 이들에게만 허락된 자산인가 보다.

이진희 어젠다기획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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