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베니아 '포퓰리즘 지도자' 사임 시위
헝가리선 새 유럽 우파 정치세력 논의도
미흡한 코로나 대응·트럼프 퇴진 맞물려
5년 전 ‘반(反)난민’과 ‘반이슬람’을 외치며 동유럽 정치권에서 급부상한 극우 포퓰리즘(대중 인기영합주의) 인기가 시들해지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사태에 대한 미흡한 대응으로 포퓰리스트 정치인들의 민낯이 드러난 데다, 전 세계에 포퓰리즘 돌풍을 일으킨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 퇴진까지 맞물린 결과다.
21일(현지시간) 미 일간 뉴욕타임스 등 외신에 따르면, 동유럽 각국의 극우 포퓰리스트 정당과 지도자들의 인기는 이제 예전만 못하다. 보수 성향 야네스 얀사 슬로베니아 총리가 대표적인 예다. 수도 류블라냐에서는 한 달 넘도록 반정부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거리에는 얀사 총리의 즉각 사임과 조기 총선을 요구하는 수만 명의 시위대가 연일 넘쳐난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얀사 총리의 입지는 탄탄했다. 그가 이끌던 민주당은 2018년 중동 출신 이민자를 막고 슬로베니아의 생존을 보장한다는 민족주의를 내세워 제 1당으로 올라섰고, 지난해 3월엔 민주당 주도의 연립정부가 65%의 지지율까지 기록했다.
하지만 인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연정은 '지지율 26%'라는 처참한 성적표를 받아 들었다. 올 초엔 야당이 “정부가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대응을 잘못 하고 있다”며 연정 불신임안을 제출하기도 했다. 의회에서 부결돼 무위로 돌아가긴 했지만, 얀사 총리의 리더십은 적잖은 타격을 입었다. 지가 투르크 전 슬로베니아 정무장관은 트위터에 “(얀사 총리는) 욕설 외엔 아무 것도 할 힘이 없을 만큼 약해졌다”고 평가했다.
헝가리도 사정은 비슷하다. ‘동유럽의 트럼프’로 불리며 10년 넘게 권위주의적 행보를 이어온 빅토르 오르반 총리를 반대하는 여론이 야당을 중심으로 거세지고 있는 것이다. 위기감을 느낀 오르반 총리는 국면 타개를 위해 이탈리아 극우 정당 '동맹'의 마테오 살비니 대표, 마테우시 모라비에츠키 폴란드 총리와 만나 유럽 내 새 우파 민족주의 정치 세력을 구성하는 방안까지 논의했다. 헝가리 싱크탱크인 ‘폴리티컬 캐피털’의 피터 크레코 연구원은 “이 회의는 유럽 내 포퓰리즘이 꺾이고 있다는 걸 숨기기 위한 절박한 조치”라고 평가했다.
특히 이달 초부터는 오르반 총리에 반대하는 시민들의 시위도 이어지고 있다. 중국 정부와 손을 잡고 중국 푸단대 캠퍼스 분교를 부다페스트에 건립하겠다고 나선 데 대한 항의다. 이밖에 극우 정당 ‘법과정의당’이 집권 중인 폴란드 역시 지지율이 떨어지자 부유세 부과, 주택 구매자에 대한 자금 지원 등 경제분야에서 ‘왼쪽 깜빡이’를 켜고 있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수십 년간 극우 포퓰리스트 정당은 유럽 정치의 ‘아웃사이더’였다. 그러나 세계 금융위기로 경제 불평등 현실이 부각된 데다, 2015년 유럽으로 난민이 대거 몰려들면서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은 자신들 편에 선 포퓰리스트 정치인들에 열광했다. 2016년에는 반인종·보호주의를 들고 나온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까지 당선되면서 포퓰리즘 바람은 한층 거세졌다. 권위주의적 대중영합주의를 내세운 우파 정당들은 기존 주류였던 중도파를 위협하면서 급속히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분위기 반전은 지난해 초 시작된 감염병 확산에서 비롯됐다. 영국 가디언은 “정권을 잡은 포퓰리스트 정치인들이 코로나19 대응에서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이는 등 무능함을 드러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전례가 없는 보건 위기 상황에서 민심은 보다 믿을 수 있고 안정감 있는 기성 정치를 선호하게 됐다는 의미다. 여기에다 이들 정부가 국가 비상사태를 코로나19 대응과 무관한 규제로 악용하고 있다는 반발도 커졌다.
작년 11월 트럼프 전 대통령의 미 대선 패배 역시 동유럽 포퓰리즘 지도자들의 사기를 꺾은 요인으로 풀이된다. 얀사·오르반 총리, 안제이 두다 폴란드 대통령 등은 모두 지난 4년간 대서양 너머의 '세계 유일 초강대국 지도자 트럼프'와의 유대감을 과시하며 정치적 입지를 굳혀 왔다. 하지만 ‘트럼프 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기댈 언덕이 사라졌다. 에린 크리스틴 젠 중앙유럽대(CEU) 국제관계학 교수는 “(트럼프의 재선 실패는) 포퓰리즘, 민족주의의 커다란 실패로 비칠 것”이라는 해석을 내놓은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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