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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 진창에 빠진 날 만난 '고통 로용'

입력
2021.06.22 04:30
수정
2021.06.22 11:50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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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주민들이 진흙탕에 빠진 차량을 빼내기 위해 힘을 합쳐 밀고 있다. 기자의 취재 차량과 동일 차종이다. 티비원 캡처

인도네시아 주민들이 진흙탕에 빠진 차량을 빼내기 위해 힘을 합쳐 밀고 있다. 기자의 취재 차량과 동일 차종이다. 티비원 캡처

차가 진흙탕에 빠졌다. 엔진 굉음과 탄내가 뒤섞이며 십여 분이나 헛바퀴만 돌다 더 깊이 빠졌다. 현장 취재를 마치고 돌아가던 참이었다. 도시 외곽 허허벌판에서 맞닥뜨린 낭패였다. 저 멀리 보이는 굴착기라도 불러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좀 전까지 취재 대상이던 현지인들이 차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처음엔 두세 명이 돌이나 나뭇조각을 바퀴 밑에 괴고 차를 밀었다. 어림없었다. 사람 숫자는 어느새 10여 명으로 늘었다. 차 진행 방향과 진흙의 강도, 미끄러지는 지점을 상의하더니 어떤 이는 운전사를 자처하고 어떤 이는 받칠 것들을 찾아오고 어떤 이들은 차를 앞뒤 좌우에서 당기고 밀었다. 사고에 정신이 팔려 그 장면을 카메라에 담아 두지 못한 게 못내 아쉽다.

결국 차는 40여 분 고투 끝에 진창을 빠져 나왔다. 차 주인인 기자보다 그들이 더 환호했다. 부탁 받은 것도 아닌, 자기 일까지 제쳐둔 그 긴 시간 어느 누구도 불평하거나 서두르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한 사람의 힘은 보잘것없지만 협력은 위대했다. 인도네시아는 그 이치를 '고통 로용(Gotong Royong)' 전통이라 부른다. 함께(Royong) 어깨에 진다(Gotong)는 뜻이다. 대학 교수 디안씨는 기자에게 "타인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줄 수 있다면 기꺼이 돕는 게 우리 문화"라고 설명했다.

남을 도왔다고 생색내지 않는다. 일의 경중을 따지지 않는다. 돈의 액수도 중요하지 않다. 남이 어려울 때 돕는 건 결국 자신을 돕는 길이라고 여긴다. 자카르타 거리에서 15㎏이나 되는 인형 탈을 쓰거나 자기 몸 상하는 염료를 바르고 구걸하는 이들을 취재하면서 들은 얘기다. "제가 돕지 않으면 저들이 절도 같은 나쁜 일에 빠져들 수도 있잖아요. 결국 저를 위한 일입니다."

코로나19 사태 초기인 지난해 3월 의료진이 방호복 부족으로 우비를 입고 환자를 돌본다는 소식에 모금 운동을 벌인 한 인플루언서가 공로상 수상을 사절하며 이렇게 말했다. "관심은 오로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집중돼야 합니다." 이것이 고통 로용 정신이다.

자카르타= 고찬유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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