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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군을 관기 취급…軍성폭력 뿌리는 전근대적 '망탈리테'

입력
2021.06.19 04:30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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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현대에도 여전한 '조선시대 관기 문화'

편집자주

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과학을 읽습니다. 역사 에세이스트 박신영 작가는 '백마 탄 왕자' 이야기에서 장자상속제의 문제를 짚어보는 등 흔히 듣는 역사, 고전문학, 설화, 속담에 배어 있는 성차별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번갈아 글을 쓰는 하미나 작가는 과학사 전공자답게 2030 여성의 건강문제, 덜 눈에 띄는 여성의 산업재해 문제 등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프랑스 역사학자 뤼시앵 페브르는 각각의 시대에 '망탈리테', 집단적인 사고방식이 존재한다고 봤다. 위키피디아

프랑스 역사학자 뤼시앵 페브르는 각각의 시대에 '망탈리테', 집단적인 사고방식이 존재한다고 봤다. 위키피디아

어릴 때부터 역사가 좋았다. 내가 사는 세상이 형성된 과정을 알아가는 것이 즐거웠다. 한편, 이상했다. 1894년 갑오개혁 때 신분제가 철폐됐다는데 왜 여성인 나는 2등 인간 취급을 받을까?

대한민국은 헌법 제11조 1항에 '모든 국민은 법 앞에서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고 명시한 민주공화국이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여전히 조선시대에 살고 있는 것처럼 여성을 차별할까? 고대 가부장들에게 처자식에 대한 생살여탈권(生殺與奪權)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도 성 감별을 해서 딸을 죽이고 있지 않은가? 나는 과연 현대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것일까?

계속 역사책을 읽다가 '망탈리테'라는 개념을 접했다. 역사학자 뤼시앵 페브르는 "각각의 시대는 심성적으로 자기 시대의 우주를 만든다"고 '16세기의 무신앙 문제'의 머리말에 썼다. 여기서 심성(心性)은 '망탈리테(mentalites)'를 번역한 말로, 오랜 기간에 걸쳐 형성된 집단적 사고방식을 말한다. 그렇다면, 내가 성차별주의자들의 말과 행동을 대할 때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시대에서 온 사람 같다고 느끼곤 했던 것이 말이 된다.

서욱(오른쪽에서 두 번째) 국방부 장관이 9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국방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성추행 피해 신고 뒤 극단적 선택을 한 공군 이모 중사를 추모하며 묵념하고 있다. 오른쪽부터 정상화 공군참모차장, 서 장관, 남영신 육군참모총장, 부석종 해군참모총장. 배우한 기자

서욱(오른쪽에서 두 번째) 국방부 장관이 9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국방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성추행 피해 신고 뒤 극단적 선택을 한 공군 이모 중사를 추모하며 묵념하고 있다. 오른쪽부터 정상화 공군참모차장, 서 장관, 남영신 육군참모총장, 부석종 해군참모총장. 배우한 기자

지난 3월 2일, 제20전투비행단 소속 여성 중사가 남성 중사에게 성추행을 당한 후 바로 부대 상관에게 신고했다. 그러나 미흡하고 부당한 처리에 절망하여 81일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남중사는 지인의 개업을 축하하는 자리를 회식이니까 참석하라고 지시한 후 돌아오는 차 안에서 성추행했다. 신고를 받은 상관들은 "없던 일로 해주면 안 되겠느냐", "살면서 한번 겪을 수 있는 일"이라며 회유를 시도했다. 피해자인 중사를 다른 전투비행단으로 전출시키고 관심병사로 취급당하게 만들었다.

왜 이럴까? 범죄 사건이 발생하면 피해자를 보호하고 가해자를 벌주는 것이 상식이 아닌가? 도대체 동료 여성을 어떤 존재로 여기고 있기에 이러는 것일까?

조선시대에도 존재한 여성 전문직

'대장금'은 궁녀에서 의녀로 성장한 일대기를 담아 특이하게 조선시대 직업의 세계를 보여준 드라마다. MBC 제공

'대장금'은 궁녀에서 의녀로 성장한 일대기를 담아 특이하게 조선시대 직업의 세계를 보여준 드라마다. MBC 제공

전통시대에 살던 여성들은 특정한 직업을 갖지 못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도 여성 전문직이 있었다. 이들 중 궁녀, 의녀, 관기는 일종의 공무원이었다.

궁녀는 궁궐 내 여러 일에 종사하는 여성들을 말한다. 왕의 후궁인 종4품의 숙원 이상을 제외하고 정5품의 상궁에서 종9품까지가 궁녀였다. 지밀내인은 윗전의 거실과 침전에서 근무했다. 다른 궁녀들은 의복을 만드는 침방, 수를 놓는 수방, 다과를 만드는 생과방, 수라를 만드는 소주방, 빨래를 맡는 세답방, 세숫물과 목욕물을 대령하고 청소를 하는 세수간 등에서 일했다. 어릴 때 입궁하여 상궁의 지위까지 오르려면 대개 30년 정도 걸렸다. 왕과 성관계가 이뤄진 후에는 곧바로 상궁으로 승진할 수 있었다.

의녀는 부인들의 질병치료를 담당했다. 간호사와 조산사 역할도 했다. 조선은 남녀 간 내외법이 엄격했기에 관청의 여종들 중에서 의녀를 선발하여 교육한 후 여성 환자를 치료하게 했다. 그러나 여성의 의술을 신뢰하지 않았기에 환자의 증세를 관찰하는 일은 의녀가 하고 처방은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남자 의원이 했다.

망탈리테의 시작

의녀의 역할은 연산군이 연회에 기녀뿐만 아니라 의녀까지 동원하면서 크게 변질되었다. 의녀가 '약방 기생'이라 불리기도 한 이유다. 의녀는 수사관의 역할도 했다. 역시 내외법 때문에 여성 범죄자를 상대할 전문 인력이 필요해서였다.

기녀, 기생은 원래 의약이나 침선, 가무, 악기 연주 등 특별한 기능을 가진 여성을 가리켰는데 점차 창기의 개념으로 변해갔다. 관기는 관청에 소속되어 가무와 기악을 담당하는 여성으로, 서울에 거주하는 경기와 지방 관청에 있는 지방기로 나눈다. 경기는 궁중 잔치에, 지방기는 지방 수령들을 위한 잔치에 동원되었는데 점차 출신지가 아닌 지역이나 변경에 부임한 사대부를 수발들고 성적 파트너가 되는 역할까지 맡게 되었다.

궁녀, 의녀, 관기는 전문직 공무원 여성들이었지만 좋은 대우를 받지 못했다. 기술직을 천시하던 시대인 탓도 있지만 이들 여성 대부분이 천한 신분 출신인 데다 남성들에게 성노리개 취급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전문 분야에서 일하는 여성인데 기본 소임 외에 성적으로 남성들에게 이용당하는 것이 부차적 임무로 맡겨진 점에 주목하자. 궁녀는 왕의 잠재적 성적 파트너였고, 의녀는 약방 기생이라 불리며 궁궐 내는 물론 궁 밖 고관대작들의 잔치에도 차출되었다. 관기는 관청 일 외에 남성 관리들의 수청을 들어야 했다. '수청(守廳)'은 원래 '관청일을 본다'는 뜻이다. '춘향전'에서처럼 사또에게 성착취를 당하는 것이 관청일을 하는 것이었다니, 놀랍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근대에도 변한 건 없었다

전문직 여성들에게 기본 임무 외에 성적 서비스까지 요구하는 조선시대 남성들의 망탈리테는 근대에도 이어진다. 개화기를 거쳐 일제강점기에 근대적 직업 여성들이 등장한다. 전화교환수, 극장 매표원, 백화점 직원, 상점 직원, 엘리베이터걸 등 서비스직에서 일하는 여성들은 모두 남성들의 성희롱에 시달렸다.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들은 일본인 남자 노동자의 4분의 1밖에 안 되는 급여를 받으며 일본인 감독과 조선인 동료 남성들의 성폭력까지 견뎌야 했다. 남성들은 '여자가 집 밖에 나와 일하면 이런 일은 예상했던 것 아니냐?'며 노동하는 여성들을 성적 대상으로 대하고 성희롱, 성추행, 성폭력을 가했다.

그러나 사회는 폭력 문제를 여성의 정조 문제로 여겼다. 피해 여성을 탓하여 여성들을 더욱 단속했다. 1935년 2월 3일자 조선중앙일보를 보자. 직업 부인의 성공 조건으로 '남자들이 잡생각하지 못하도록 항상 주의하시는 분'이라고 썼다. 당시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21세기에도 현재진행형

21세기에 발생한 공군 성폭력 사건으로 돌아오자. 남중사가 공식적인 회식이 아닌 지인의 개업식 축하연에 부하 여군을 데려간 것은 의녀를 약방 기생으로 여겨 잔치에서 춤추게 하는 것과 같다. 동료 군인이 아니라 기생으로 여겼으니 돌아오는 차 안에서 성추행하는 것은 이어지는 순서이리라.

이렇게 일하는 여성들을 동료 노동자가 아니라 관기(官妓)로 여기는 조선시대의 망탈리테를 가졌기에 어떤 남성들은 여성 직원에게만 탕비실 업무나 사무실 청소를 시키며, 회식 때에는 술 따르라고 강요하고, 거래처 접대할 때 데려가고, 회식하러 간 노래방에서 부르스 추자고 껴안고, 사귀자고 들이대다가 성폭행까지 한다. 안희정 전 충남 도지사와 고(故) 박원순 전 서울 시장, 오거돈 전 부산 시장, 우리는 벌써 몇 명의 예를 확인했다.

이는 한 개인의 일탈 문제가 아니다. 그러기에는 너무도 많은 성폭력 사건이 발생하고 있으며 가해 남성들을 두둔하고 피해 여성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회 전체의 집단 심성, 망탈리테의 문제다.

앞서 공군 성폭력 사건에서 상급자들이 "살면서 한번 겪을 수 있는 일"이라며 피해자를 회유했다는 것을 떠올려보자. 그 말을 뒤집으면 남자들이 '살면서 한번은 하는 일'이 된다. 여기에는 남성은 당연히 여성들을 성적으로 이용해도 된다는 생각이 바탕에 있다.

지난해 한 네티즌은 이순신 장군과 고 박원순 시장을 비유한 글을 써 큰 논란을 낳았다. 네이버 뉴스 캡처

지난해 한 네티즌은 이순신 장군과 고 박원순 시장을 비유한 글을 써 큰 논란을 낳았다. 네이버 뉴스 캡처

한 네티즌이 고 박 시장 장례식장 조문 문제에 대해 '이순신 장군도 관노와 잠자리에 들었다. 그렇다고 제사를 안 지내는 것은 아니다'는 글(2020년 7월 13일 온라인 커뮤니티 클리앙)을 써서 문제가 되었던 사건이 단적인 예다. 코로나19 전담 병실에 입원해서 간호사에게 팬티를 빨아달라고 요구한 남성 환자의 예(2020 8월 25일 MBC 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도 있다. 모두 일하는 여성을 수청들고 수발드는 관기로 여기는 조선시대의 망탈리테를 잘 보여준다.

지난해 8월 코로나19 전담병원 간호사 A씨는 MBC 라디오 '김종배의 시선 집중' 인터뷰에서 "팬티까지 빨아달라고 하는 분도 있다"는 고충을 전해 충격을 줬다. 네이버 뉴스 캡처

지난해 8월 코로나19 전담병원 간호사 A씨는 MBC 라디오 '김종배의 시선 집중' 인터뷰에서 "팬티까지 빨아달라고 하는 분도 있다"는 고충을 전해 충격을 줬다. 네이버 뉴스 캡처

남성 개개인이 미개하고 악하다는 말이 아니다. 이렇게나 성차별과 성폭력에 관대한 조선시대의 사고방식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많으니 사회적으로 시스템을 갖추는 한편, 개인적으로 각성하고 노력하자는 말이다. 직장 성폭력은 법으로 금지하는 폭력이며 노동권 침해다. 애초에 안 해야 하고, 사건이 발생하면 가해자를 옹호하고 피해자를 회유할 것이 아니라 정당하게 처리해야 한다. 아직도 조선시대에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명심하자. 일하는 여성들은 관기가 아니다.


박신영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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