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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저장강박증 뒤엔 친구 잃은 대구지하철 참사의 아픔이...

입력
2021.06.22 17:00
수정
2021.06.22 17:11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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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신재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편집자주

의사라면 평생 잊지 못할 환자에 대한 기억 하나쯤은 갖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생명을 구한 환자일 수도 있고, 반대로 자신에게 각별한 의미를 일깨워준 환자일 수도 있다. 아픈 사람, 아픈 사연과 매일 마주하는 의료종사자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1. A씨는 저장강박증 환자였다. 사소한 물건에도 온갖 의미를 부여하면서 버리지 않고 방안에 쌓아 놓아야만 안심이 되었다. 그의 방은 발 디딜 틈 없이 온갖 잡동사니로 꽉 차 있었고, 악취마저 진동했다.

그는 상담 중 힘겹게 2003년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 이야기를 꺼냈다. 당시 그는 단짝 친구와 대구 시내의 한 영어학원을 함께 다니고 있었다. 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학원에 먼저 도착해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끔찍한 화재가 일어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혹시나 싶어 문자메시지를 보냈지만, 친구는 답이 없었다. 친구는 바로 그 사고 지하철에 타고 있었다.

사건의 충격이 온 나라를 뒤덮었고, 그 또한 단짝의 사망 소식에 오열했다. 많은 이들이 A씨에게 심경은 어떤지, 과거 친구와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 등에 대해 물었지만 그는 도저히 말할 수 없었다. 자신만 살아남은 데 대한 죄책감이 마음에 가득했다. 이야기를 한다면 친구에게 또 죄를 짓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때부터 A씨는 친구의 기억이 묻어 있는 모든 것들을 영원히 간직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친구와 대화를 나눈 휴대전화, 학원 교재, 친구가 준 생일선물 같은 것들을 모두 방 한쪽에 모아놓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모으는 행동은 점점 더 심해졌다. 자신을 스치는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게 됐고, 무언가를 버리는 행위 자체가 불안하게 느껴졌다. 참사가 남긴 상처는 저장강박증이라는 형태로 그의 삶에 스며들었다.

#2. 심한 불안과 불면으로 교사 B씨가 진료실을 찾았다. 자신이 담당하던 반 아이가 교실에서 넘어져 얼굴에 큰 상처가 났고, "학교 측 관리 소홀이 아니냐"는 아이 학부모의 항의로 고초를 겪던 터였다.

하지만 그녀를 더욱 힘들게 했던 건 '불의의 사고'라는 맥락이었다. 2014년 세월호 참사, 그때 떠난 아이들 중 몇 명은 B씨가 중학교 근무 시절 담임을 맡았던 아이들이었다. B씨도 당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슬픔도 지워질 걸로 생각했다. B씨는 이미 그 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근무지를 옮긴 상태였다. 바쁜 일상 속에서 기억은 조금씩 옅어져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듯했다.

하지만 최근의 사건은 다시 2014년의 힘든 순간을 떠올리게 했다. 그녀는 큰일이 아님에도 걱정과 염려로 밤을 지새우는 일이 잦아졌다. '또 누가 다치는 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머리 안을 어지럽혔고 쉽게 과민해졌다. 격렬한 슬픔과 두려움이 '불의의 사고'를 매개로 다시 의식의 수면 위로 올라온 탓이었다. 마음의 상처가 아물었다 착각했지만, 실은 깊이 곪은 채 낫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듯 자신이 겪은 충격적 사건은 꽤 시간이 지난 후에도 뜻하지 않은 순간, 격한 두려움과 슬픔의 형태로 다시 나타난다. 심리적 트라우마가 되어 마음 깊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트라우마를 겪은 뇌는 언어를 담당하는 '브로카 영역'(Broca’s area) 주변부의 혈류가 급격하게 저하된다고 알려져 있다. 심한 충격을 받은 이들이 말문이 막히고, 한동안 대화가 어려워지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이다.

또 감정의 억압으로 여러 문제가 나타나기도 한다. 안타깝게도 A와 B 두 환자 모두 자신의 상처를 온전히 말할 기회가 없었다. 아마도 뇌의 일부가 '얼어 붙어' 차마 이야기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남은 상처의 기억은 그들 삶의 꽤 많은 영역을 차지하게 됐다.

ⓒGetty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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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를 치유하려면 밖으로 이야기해야 한다. 내 마음을 충분히 말할 수 있는 상대에게, 따뜻하고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서, 마음 깊은 곳에 숨겨둔 이야기를 끄집어 내면 그것만으로도 상처 묻은 아픈 감정들이 털려 나간다.

두 환자 모두 마음에 숨겨온 상처를 이야기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다. 그 기억을 발화(發話)하는 행위 자체가 두려웠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먼지 묻은 기억을 힘겹게 꺼내자, 비로소 그들 삶은 회복 탄력성의 회로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두 환자를 만나며 마음의 상처, 그리고 그 상처의 치유를 대하는 우리 사회의 태도를 함께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마음의 상처가 바쁜 일상에 밀려나가고, 금세 원래의 삶을 찾을 거라 생각한다. 그러니 상처에만 머물러 있지 말고, 거기서 어서 벗어나라 재촉한다. 마음의 상처를 부둥켜안고 있는 이들을 좋지 않은 시선으로 보거나, '나약하다'고 폄하하고, 때로 조롱하기도 한다. 상처를 입은 이에게 ‘잊어버려라’는 말을 너무 쉽게 건넨다.

그러나 두 환자처럼 충분히 이야기하지 못한 상처는 아주 작은 단서에도 사건 당시의 충격을 고스란히 재현한다. 마음 안에서 반복 재생되는 기억은 겪어보지 않은 이들에겐 상상할 수 없는 끔찍한 공포일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 공동체는 상처받은 이들에게 그 기억과 마음을 충분히 이야기하고, 얼어붙은 뇌가 회복할 기회와 시간을 주어야 한다. 트라우마는 없어지지 않지만, 우리가 함께 나눈 따뜻한 대화를 통해 상처가 된 기억에 대한 의미가 바뀌고, 또 삶에 통합될 수 있다. 마음의 상처는 그렇게 치유되는 것이다.

강남푸른정신건강의학과의원 대표원장

강남푸른정신건강의학과의원 대표원장

※잊지 못할 환자에 대한 기억을 갖고 계신 의료인이라면 누구든 원고를 보내주세요. 문의와 접수는 opinionhk@hankookilbo.com을 이용하시면 됩니다. 선정된 원고에는 소정의 고료가 지급되며 한국일보 지면과 온라인뉴스페이지에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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