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일상 속 생명과학 이야기가 격주 토요일 <한국일보> 에 찾아옵니다. ‘여행하는 과학쌤’이란 필명으로 활동 중인 이은경 고양일고 교사가 쉽고 재미있게 전해드립니다. 한국일보>
교사란 직업 때문에 근무지 이동이 잦다. 올해 새로운 학교는 지하철역에서 7㎞ 정도 떨어진 곳이다. 출근길에 어울리지 않는 한적한 도로를 달리다 주말 나들이인 듯한 착각에 빠질 때 즈음 현실을 일깨워주는 아파트 단지와 학교가 등장한다. 넉넉한 땅에 지어진 학교 건물은 여러 동을 연결한 독특한 구조인데, 이 복잡한 연결 통로에 적응하기까지 한동안 중앙 계단만을 이용해 각 동을 빙 둘러 다녔다.
최근에 비로소 별관의 새로운 계단을 오르자 계단참의 커다란 창을 통해 완전히 다른 세상이 열렸다. 아파트와 상가로 둘러싸인 평범한 학교 앞 풍경과 달리 뒤쪽으로는 담장 바로 옆부터 넓은 논이 펼쳐져 있었다. 잘 갈린 논이랑에는 빛바랜 짚단이 굴러다녔고, 자투리 밭에 길게 자란 대파에선 파꽃이 하얗게 빛났다. 볏짚들이 잘리기 전에는 창밖으로 어린 왕자의 머리칼 같은 황금빛이 번쩍였을 터다.
몇 주 뒤엔 긴 호스를 타고 논에 물이 차올랐고 모판의 푸른 싹이 삐죽이 손을 내밀었다. 가을이 되면 차올랐던 물과 햇빛을 머금고 영근 벼가 다시 금빛으로 물결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서울 촌사람은 글로만 배웠던 생명의 순환이다.
생명체는 물질을 분해할 때 발생하는 에너지를 이용하기도 하고, 에너지를 들여 필요한 물질들을 합성하기도 한다. 생명 활동을 위해 일어나는 모든 물질의 변화를 물질대사라고 하는데, 벼는 논에 차오른 물과 공기 중의 이산화탄소를 재료로 포도당과 녹말을 만들어내고 필요에 따라 이를 분해해 에너지를 얻으며 살아간다. 빛 에너지를 이용해 포도당을 합성하는 광합성, 반대로 포도당을 분해해 생명 활동에 필요한 에너지를 얻는 세포 호흡은 모두 물질대사의 일종이다.
씨앗에서부터 하나의 작물까지 몇 달 동안 생장하고 다시금 낟알을 맺으며 자손을 번식하는 모든 과정에는 물질대사가 필수적이다. 이때 씨앗에 들어 있던 작은 수정란이 줄기와 잎 등으로 분화하면서 하나의 개체가 되어 가는 과정을 발생, 어린 싹이 세포 수를 늘려가면서 성체가 되는 과정을 생장이라 한다. 이 성체가 뿌린 씨앗이 이듬해 논을 새로이 물들이듯 자신을 닮은 새로운 개체를 만드는 것을 생식이라 하며, 이 과정에서 유전 물질이 전달된다. 물질대사, 발생과 생장, 생식과 유전은 모두 생물의 특성이다.
생물이 가지는 또 다른 특성은 환경에 따라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러 세대를 거친 변화를 통해 집단 전체에서 특정 유전자의 비율이 달라지는 것을 진화라 한다. 이때 서식하는 환경에서 유리하게 살아남도록 몸의 구조나 생활 습성의 변화가 일어났다면 이를 적응이라 한다. 열대 지방에 적응한 벼의 품종과 온대 지방에 적응한 벼의 품종이 다른 것처럼 말이다. 다만 적응과 진화가 늘 함께 일어나는 현상은 아니다. 집단 내에서 유전자의 비율이 달라졌으나, 환경에 적응해 생존하는 것과는 크게 관계없는 변화인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생존과의 관계가 어떻든 진화와는 거리가 멀어 매일이 뻔한 직장에서, 매 순간 변화하는 생명체의 특성을 눈으로 지켜볼 수 있다는 것은 멋진 일임이 틀림없다. 변함없는 쳇바퀴를 굴리듯 직장의 계단을 오르내리는 모든 순간에 우리는 숨쉬고 먹고 마시며 물질과 에너지를 변화시키고 있다. 창밖 너른 논의 모양과 색감이 시시각각 달라지고 있듯이. 새로운 학교에서 적응하는 동안 금빛 논에서 일렁이는 바람 소리마저 사랑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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