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루 대선 ‘좌파 교사’가 '독재자의 딸' 꺾었다... 남미 ‘핑크 타이드’ 부활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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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 대선 ‘좌파 교사’가 '독재자의 딸' 꺾었다... 남미 ‘핑크 타이드’ 부활하나

입력
2021.06.11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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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신인 카스티요 당선 확실... 승리선언
'대선 3수' 후지모리 또 고배... 구속 위기도
선거불복·코로나 등 당분간 정국혼란 우려
블룸버그 "남미 '좌파 물결' 부활의 신호탄"

페루 대통령 선거에서 사실상 당선을 확정 지은 '좌파' 자유페루당 후보 페드로 카스티요가 11일 수도 리마의 당 본부 발코니에서 지지자들을 향해 연설하고 있다. 리마=AFP 연합뉴스

페루 대통령 선거에서 ‘초등교사 출신ㆍ정치 신인ㆍ사회주의자’가 ‘대권 3수ㆍ정치 엘리트ㆍ독재자의 딸’을 꺾는 파란을 일으켰다. ‘좌파’ 자유페루당 후보 페드로 카스티요(51)가 ‘우파’ 민중권력당 후보 게이코 후지모리(46)를 제치고 사실상 당선을 확정 지은 것이다. 득표율 0.34%포인트 차이의 신승이었다. 다만, 선거 기간 민심이 좌우로 극명히 갈라진 데다 후지모리가 부패 혐의 형사처벌을 피하려 ‘선거 사기’를 주장하고 나서는 등 한동안 정국 혼란은 불가피해 보인다. 페루의 좌파 정권 출범이 최근 격변하고 있는 남미 정치 지형에 적잖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11일(현지시간) 페루선거관리사무국에 따르면, 이날 0시 20분 기준 개표가 99.56% 진행된 상황에서 카스티요가 득표율 50.172%로 후지모리(49.828%)를 근소하게 앞섰다. 득표수 차이로는 6만여표가량에 불과하지만, 결과가 뒤집히진 않을 게 확실하다고 현지 언론들은 전했다. 카스티요는 “민중이 깨어났다”고 승리 선언을 한 뒤, “선거 과정의 분열을 딛고 모든 페루 국민을 위해 일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웃 국가들도 카스티요에게 당선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은 “남미 발전을 위해 힘을 합치자”고 트위터에 썼고, 에보 모랄레스 전 볼리비아 대통령도 “카스티요는 영혼의 형제이자 투쟁 동지”라고 치켜세웠다.

이번 페루 대선은 이념ㆍ계급ㆍ출신이 정반대인 두 사람이 맞붙어 세계적 관심을 모았다. 후지모리는 1990~2000년 집권한 일본계 알베르토 후지모리 전 대통령의 장녀로, 2011년과 2016년에 이어 세 번째 대선 도전이었다. 반면 북부 빈농 가정 출신으로 고향 초등학교에서 25년간 교편을 잡았던 카스티요는 2017년 교사 총파업 시위를 주도하며 전국적 인물로 급부상했다. 대통령은커녕, 선출직 공직 경험도 전무하다. 지지층도 뚜렷하게 갈렸다. 해안 지역 대도시 고소득층은 후지모리를, 산간 농촌 지역 저소득층은 카스티요를 각각 선택했다.

문제는 대선 결과와 별개로, 당분간은 정국 안정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점이다. 일단 패색이 짙어졌음에도 후지모리는 선거 불복 의사를 내비치는 등 쉽게 물러서지 않겠다는 태세다. 선거관리사무국이 “증거 없이 선거 결과에 의문을 제기하는 건 무책임하다”고 경고했음에도, 후지모리는 개표 부정 의혹을 제기하며 “의심스러운 50만표를 무효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임기 중 인권 범죄로 25년형을 받고 수감 중인 아버지 후지모리 전 대통령처럼, 그 역시 정치자금 세탁과 조직범죄 혐의로 기소된 터라 면책특권을 얻지 못하면 감옥행이 유력하다. 실제 페루 검찰은 선거 마무리 수순에 들어서자 ‘후지모리 보석 철회ㆍ구속 수감’을 법원에 요청했다. 후지모리로선 더욱 더 절박할 처지일 수밖에 없다.

대선 후폭풍으로 사회 분열과 정치 혼란이 심화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이후 국내총생산(GDP)이 11% 넘게 폭락하고 인구 대비 사망자 수 세계 1위에 달할 만큼, 페루 상황은 이미 최악이다. 잇단 부패 스캔들로 지난 5년간 대통령도 네 번이나 바뀌었다.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는 “선거를 거치며 국민들 간 경제ㆍ계급 차이가 더욱 선명해졌고, 혼란은 오래 지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특히 카스티요의 정치 기반이 약하다는 점은 상당한 불안 요인이다. 좌파 정당의 의회 내 의석 점유율은 32%로 우파 정당(45%)보다 훨씬 낮다. 반대세력의 저항을 돌파하고 안정적으로 국정을 운영할 수 있는 힘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워싱턴포스트는 “카스티요 정부가 수많은 도전 속에 생존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며 “정치 불안은 페루 민주주의를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다만 카스티요가 성공하든 실패하든, 페루발(發) 정치 격변은 이웃국가들로 번져갈 공산이 크다. 남미 국가들은 경제 불황과 계급 불평등으로 오랫동안 시름해 왔다. 코로나19 감염자 2,500만명, 사망자 100만명에 달하며 공중보건 체계는 붕괴된 지 오래이고, 정부 무능 탓에 백신 접종도 더디기만 하다. 지배 엘리트를 향한 반감과 불만은 폭발 직전이다. 블룸버그통신은 “이미 좌파가 집권한 아르헨티나, 베네수엘라, 볼리비아에 이어서 브라질과 콜롬비아, 칠레에서도 좌파 정치인이 인기를 얻고 있다”며 “페루 대선 결과는 지난 20년간 남미를 휩쓴 ‘핑크 타이드’(좌파 물결) 부활의 신호탄”이라고 분석했다.

김표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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