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세에 붓 잡고 그림 재능 보였지만?
아버지가 유명 화백, 오히려 열등감 자극?
장애 생활고 딛고 뒤늦게 화업 이어가
"아버지처럼 오래...30년은 더 그릴 것"
“오래전부터 액자 없는 그림을 길거리에 늘어놓고 전시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전시 공간에서 전시를 하게 되리라곤 생각을 못 했네요.”
5세에 붓을 들었지만 일흔이 돼서야 첫 개인전을 열게 됐다. '동양의 피카소'라 불렸던 고 하반영 화백의 넷째 아들 하지홍 작가의 이야기다. 그의 인생 첫 개인전 ‘생화, 그래도 그림(Still, I’m drawing)’은 12일부터 전주영화제작소 1층 기획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다.
“그림에 재주가 있었지만 생계를 위해 젊은 시절에는 공연장 무대 미술이나 영화 세트장에서 디자인 관련 일을 했어요. 정말로 배가 고플 때엔 그림을 그려 주점에 내다 팔기도 했지요. 상업 그림인 모방화를 그려 수익을 내기도 했습니다. 슬하에 세 아이를 두고 난 후에는 그것조차 어려워 포장마차, 음식점 등을 하며 생계를 유지해 왔어요.”
어릴 적부터 아버지 화실을 드나들며 좋은 작품을 많이 보고 영감을 얻었던 그는, 학창 시절 그림과 관련된 상을 놓쳐 본적이 없을 만큼 그림에 소질을 보였다. 하지만 열등감에 사로잡혀 재능을 충분히 살리지 못했다. 하 화백은 “선천적으로 다리가 불편해 내성적이고 비관적이었다. 잘나가는 아버지가 계셔서 장애에 대한 열등감을 더 가졌던 기억이 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생업 탓에 그림을 등져야 했던 그가 다시 그림을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한 건, 둘째 아들 준일씨가 3년 전 작업 공간을 마련해주면서다. 4세, 6세 손주들도 원동력이 됐다.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터전이 생긴 것도 중요하지만, 나의 핏줄이자 나를 닮은 두 손주가 새싹같이 자라나는데, 부끄럼 없는 화가 할아버지가 되고 싶었어요. 손주들을 보며 삶의 희망을 얻었어요.”
이번 전시가 열리게 된 것도 자식 덕이 크다. 아들 준일씨는 전주영화제작소가 무료 대관 공모 전시를 모집했을 때 여기에 응모해 전시 기회를 따냈다. 준일씨는 “아버지 그림이 너무 좋아 이 그림들이 널리 전시되길 바라는 마음이 컸다. 아버지처럼 힘들게 지내온 분들도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하루 7~8시간을 화실에서 작업한다는 그는 이번 전시에서 40점을 선보인다. 하 화백이 5세 때 그린 그림을 포함해, 추상화인 사계절과 사람들, 정물화인 얼음꽃, 풍경화인 구천동 계곡 등이다. 그중에서도 하 화백은 ‘흔적-지난온 길’이라는 무채색의 그림에 가장 애착이 간다고 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붓으로 인해 생성된 기포들이 점처럼 모여 있어요. 이 그림의 제목이 흔적인 이유죠. 우리가 살면서 남긴 흔적, 그게 바로 우리가 지나온 길이라고 생각해요. 허무하다고 느낄 수 있겠지만 우리가 노력한 순간들, 우리의 모든 희로애락이 삶에 녹아 있어요.”
하 화백은 아버지처럼 죽기 직전까지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했다. 98세에 별세한 하반영 화백은 살아 있을 때 국내 최고령 현역 작가로 활동한 바 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붓을 놓지 않으셨어요. 저도 앞으로 30년은 힘이 닿는 데까지 그림을 그리면서 지내고 싶어요. 2015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가끔 꿈에 나타나시는데, 흰 종이를 들고 이렇게 말씀하세요. 지홍아 뭐하고 있냐, 숙제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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