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디언 편집국장의 쇼팽 도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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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디언 편집국장의 쇼팽 도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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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10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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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아
조은아피아니스트ㆍ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앨런 러스브리저. 앨런 러스브리저 인스타그램 @arusbridger


인생의 오후, 중년의 나이에 이르고 보니 여러 프로그램을 산만하게 열어 놓은 컴퓨터마냥 숨 가쁜 일상에 부대낄 때가 많다. 잘 먹고 잘 버는 미션만으로는 정신의 공허를 피하기 어렵다. 머릿속에 꽉꽉 정체되어 있는 생각을 비워내고 마음의 시계를 리셋할 수 있어야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얽힌 잡념이 해소될 텐데, 그럴 만한 시간은 충분하지도 않고 너무 늦은 것 같기도 하다. 이렇듯 돌파구를 찾아 헤매고 있을 때 마치 치료약처럼 흥미로운 책을 만나게 되었다. ‘다시, 피아노’ 아마추어 피아니스트가 쇼팽 발라드 1번을 연습하는 과정을 상세히 기록한 책이다.

이 책의 저자 앨런 러스브리저는 영국의 언론사 가디언의 전설적인 편집국장이다. 지구에서 가장 바쁜 사람 중 하나로 손꼽혀도 좋을 저명한 대 기자는 ‘쇼팽 발라드 1번’을 무대에서 연주하기로 마음먹는다. 피아노 연주는 그의 본업과 동떨어진 취미이지만 장장 1년 4개월 동안 출근 전 20분 연습을 지켜내며 연습일지를 상세히 기록한다. 분량만으로도 600페이지에 달하는데 기자의 직업정신은 연습과정 내내 여타 음악가들과는 사뭇 다른 양태를 취한다. 연습기록은 치밀하고 상세하며 논리적이다. 독자로선 매우 흥미로운 지점이 아닐 수 없다.(관련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ZwJKGEWarAk)

가디언 편집국장의 일상은 상상만으로도 숨이 막힌다. 매주 80시간을 근무하고, 일을 마친 후에도 네트워크 확장을 위해 만찬에 참여해야 하며, 시간당 70통씩 메일이 쌓여 간다는데 이 와중에도 그는 매주 수요일 아침 시간을 수성해 레슨을 받고, 주말엔 별장에 스스로를 고립시켜 발라드를 연습한다. 그러므로 이 책에선 2개의 세계가 동시에 흐른다. 편집국장의 현실세계는 발라드의 코다처럼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반면, 피아노에 오롯이 몰입하는 연습시간은 창조적 여백과 함께 천천히 흘러간다.


앨런 러스브리저의 '다시 피아노'

출근 전 아침 20분의 연습을 거르지 않기 위해 그는 성심을 다해 노력한다. 하루에 열너덧 시간씩 사무실에 붙잡혀 있는 처지다 보니 어떤 주는 총 한 시간밖에 연습을 하지 못했는데도 불평하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업무 압박과 스트레스가 극단으로 치달을수록 쇼팽 발라드 연습이라는 자그마한 탈출밸브를 더더욱 소중히 여겼다. 치열한 전장과도 같은 하루 일과를 시작하기 전, 짧게나마 음악에 집중하는 시간이 정신의 면역력을 높여 주었고, 본업과는 전혀 상관없는 발라드 연습에 전념하면서 삶의 균형을 되찾을 수 있다 토로한다. 그러니 연습을 하고 집을 나서는 날은 어떤 일이 닥쳐도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었지만, 연습을 건너뛴 날은 업무가 더 고단하게 느껴졌다고 한다. 시간은 충분한가, 너무 늦은 것은 아닌가라는 게으른 질문이 엄습해올 때마다 그는 시간을 내야 삶의 질이 더 나아진다는 신념으로 버티었다.

직접 악기를 다뤄본 사람만이 표현할 수 있는 생생한 음악적 묘사들도 흥미롭다. 게다가 저자는 가디언 편집장 특유의 네트워크를 적극 활용한다. 알프레드 브렌델, 다니엘 바렌보임, 머레이 페라이어, 엠마누엘 엑스와 같은 불세출의 거장 피아니스트들을 직접 만나 쇼팽 발라드 연주에 관한 조언을 구하며 자신의 연주를 완성해 가는 것이다. 거장 앞에서 주눅이 들 법한데도 오히려 직업 연주자가 아니어서 누릴 수 있는 장점을 스스로 발견한다. “순수하게 사랑하고,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시간과 돈, 노력을 기꺼이 투자하고, 여유롭되 끈질기고, 언제든 시작해 끝낼 수 있으니 전문가들이 누리지 못하는 것을 만끽할 수 있다.”

영국 가디언지의 편집국장과 쇼팽 발라드 1번, 두 존재의 만남은 명쾌하게 이해하기 어려운 조합이다. 50대 남성의 무모한 도전기는 숨 가쁜 일상에 치이면서도 자신의 호기심과 취향을 발견하고 싶은 이들에게는 무한한 용기를 북돋아준다.

조은아 피아니스트ㆍ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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