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 육류, 지하철, 선박…. 하나 같이 현대인의 삶을 책임져주는 필수 요소들이다. 세계 최강국 미국이라면 이들의 중요성은 훨씬 더하다. 하지만 요즘 미국에서는 이런 일상의 기반이 연일 ‘사이버공격’의 표적이 되고 있다. 해커의 목적은 물론 돈이다. 주요 인프라 공급망을 뒤흔들어 수많은 시민이 불편을 겪으면 엄청난 보상을 받을 거라는 노림수가 깔려 있다. 하지만 공급망 해킹은 단순한 불편에 국한되지 않는다. 어김 없이 신(新)냉전의 경쟁자 중국ㆍ러시아가 배후로 지목돼 미 경제의 발목을 잡는 건 물론, 안보 위협으로 확장할 폭발력을 내재하고 있다.
2일(현지시간) 미국에선 여객선도 해커의 먹잇감이 됐다. 미 동부 연안을 운항하는 ‘매사추세츠 증기선 관리국’은 이날 “우즈홀, 마서스비니어드, 낸터킷 기선당국이 랜섬웨어(사이버 해킹 후 몸값 요구) 공격의 대상이 됐다”고 밝혔다. 다행히 위성항법장치(GPS)나 레이더 등에 영향을 미치지 않아 운항 중인 선박과 승객은 무사했지만, 당분간 신규 예약과 티켓 발권 등 업무에 차질이 불가피하다.
지하철도 안전지대가 아니었다. 이날 뉴욕 지하철을 운영하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교통국(MTA)이 4월 중국 정부와 연계된 것으로 추정되는 해커들의 공격을 당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열차 통제시스템은 안전했으나 매일 수백만 명이 이용하는 교통체계의 보안 취약성이 노출된 것만은 분명하다.
두 사례를 통해 최근 글로벌 범죄조직이 미국의 공급망 붕괴를 노리고 있다는 점이 확실해졌다. 지난달 7일 미 최대 송유관 운영사인 콜로니얼 파이프라인이 동유럽 해커집단에 뚫렸고, 같은 달 30일에는 세계 최대 육류가공업체인 JBS의 미 자회사가 해킹 공격을 받아 공장이 폐쇄됐다. 미 연방수사국(FBI)은 이날 공격 주체로 러시아 해커 조직 ‘레빌’과 ‘소디노키비’를 특정했다.
이들의 목적은 경제적 이득에 그치지 않는다. 시민들 일상의 숨통을 조여 불편을 실물 경제 타격으로 이어지게 하고, 종국엔 미국의 안보와 국익을 훼손하는 훨씬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 실제 미 남동부 석유 공급 45%를 책임지는 콜로니얼 파이프라인이 해킹으로 닷새간 가동을 중단하면서 동부 지역에 ‘주유 대란’이 일었다. 사재기가 비일비재했고, 휘발유 가격은 7년 만에 가장 높은 수준까지 치솟았다. 미국 내 쇠고기 소비량의 23%를 공급하는 JBS 해킹 사태도 당분간 육류 가격 상승을 유발할 가능성이 크다. 일간 워싱턴포스트는 “일련의 사건은 사이버공격이 미 경제를 얼마나 빨리, 또 심하게 흔들 수 있는지 보여준다”고 해석했다.
공급망 교란은 물가 상승 압력을 가중시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는 미 경제의 회복 속도를 늦출 수도 있다.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대규모 해킹은) 감염병 확산 이후 안그래도 값이 뛴 유가와 육류 가격 상승을 더욱 부채질할 지도 모른다”고 진단했다.
조 바이든 행정부도 연쇄 피해를 부르는 공급망 해킹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러시아의 랜섬웨어 공격에 보복 조치를 할 것이냐는 질문에 “면밀히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16일 열리는 미러 정상회담에서 미국이 사이버공격을 중요 안보 의제로 다룰 가능성이 한층 커진 셈이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