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창간 67주년 인터뷰]
올 2월 은퇴… 창간 67주년 기념 인터뷰
"어두운 권부 방치되면 민주주의 오작동
'확증 편향'의 시대… 사실·허구 구분 흐릿
정보 제공 통한 시민 배출이 언론의 사명"
“다음 67년 동안에는 ‘고품질 저널리즘’(high-quality journalism) 실천에 성공하기를 바랍니다.”
미국 유력 일간지 워싱턴포스트(WP)를 전성기로 이끈 뒤 올 2월 은퇴한 마틴 배런(66) 전 WP 편집국장이 창간 67주년(9일)을 맞는 한국일보에 건넨 덕담이다. 아카데미상을 받은 영화 ‘스포트라이트’ 속 등장인물의 실제 모델이기도 한 그가 편집국장 자리를 지키던 2013년 초부터 8년간 WP는 퓰리처상을 10차례 수상했고, 기자 수는 580명에서 1,000여 명으로 두 배 가까이 늘었다. 지난해 말 공개된 대로 아시아 담당 뉴스 속보 거점을 서울에 둔다는 결정을 내린 이도 그였다.
배런 전 국장이 믿는 언론의 본령은 ‘권력 감시’다. ‘민주주의는 어둠 속에서 죽는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 대통령 취임 직후(2017년 2월) 채택된 WP의 이 슬로건에 그의 신념이 잘 드러나 있다. 온갖 이권이 도사린 권부(權府)는 은폐되고 음습하게 마련이고, 그곳이 방치되면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 거기서 일어나는 일들을 민주주의 시민들이 알 수 있도록 말 그대로 조명(照明)하는 게 바로 그가 생각하는 언론이 해야 할 일이다.
그에 따르면 지금 민주주의는 위기다. “많은 사람이 사실과 허구를 구분하지 못한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보이는 대로 보려 하지 않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바야흐로 ‘확증 편향’의 시대다. 신념과 일치하는 정보가 아니면 거부되기 일쑤다. 가뜩이나 무관심 문턱이 높은 터에 설상가상인 셈이다. 이렇게 흐릿한 사실과 허구 간 경계는 권력 놀음을 즐기는 자들에게 유리한 환경이다. 배런 전 국장은 “정치인들에게는 이익이 되면 진실, 이익과 멀면 거짓”이라고 단언했다. 그런 견지에서 현재 한국 정부ㆍ여당이 입법을 추진 중인 ‘징벌적 손해배상제’는 위험하다. 손해액 3배 배상의 빌미가 될 허위ㆍ왜곡 보도 여부를 정부가 멀쩡하게 판단할 리 없다고 그는 여긴다.
민주주의 성립의 전제 조건이자 성패의 관건은 충분히 정보를 제공받은, 그래서 제대로 알고 있는 시민이다. 그런 시민의 배출이 언론의 사명이라는 게 배런 전 국장의 주장이다. 그가 보기에 사실(fact)은 여전히 힘이 세다. 권력이 숨기고 싶은 걸 폭로해 책임을 추궁하는 탐사 보도, 그게 언론이 해야 하고 잘할 수 있으며 언론에 독자가 기대하는 일이라고 그는 역설했다.
WP는 상대적으로 한반도 보도에 강한 신문이다. 최근 조 바이든 미 행정부의 대북 정책 윤곽을 꼼꼼한 취재로 미리 분석하기도 했다. 속보 거점을 서울에 신설키로 한 이유 중 하나도 “서울 자체가 뉴스의 근원이기 때문”이라고 그는 소개했다. 자신이 국장 자리에 앉은 해 WP를 인수한 아마존 최고경영자(CEO) 제프 베이조스를 통해 언론 산업 지형을, 임기 후반 내내 대립했던 권력자 트럼프 전 대통령을 통해 ‘언론과 민주주의’라는 테마를 각각 살폈고, 그걸 지금 책으로 정리 중이라는 그를 최근 이메일로 만났다.
-WP의 ‘민주주의는 어둠 속에서 죽는다’라는 슬로건부터 인상적이다.
“언론의 역할은 정부와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빛을 비추는 것이라는 뜻이다. 언론인으로서 우리 임무는, 민주주의에 시민으로 참여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필요하고 그들이 알아야 할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다. 충분히 정보를 제공받은 시민 없이는 민주주의가 성공할 수 없다.”
-영국 로이터연구소의 ‘디지털 뉴스 리포트 2020’은 한국 뉴스 소비자들이 자신의 정치적 의견과 유사한 방향으로 편향된 뉴스를 소비하는 경향이 있다는 데 주목했다. 가짜 뉴스 논쟁도 그렇고, ‘팩트’(사실)가 실종된 세상이다.
“많은 사람이 사실과 허구를 구별하지 못한다. 그들은 정보를 제공받기보다 (신념을) 확인받기를 좋아한다. 다시 말해 가능성을 열어 두고 증거를 수용하기보다 기존 관점을 강화해 주는 사실 쪽으로 기운다. 정책에는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사실들이 공유되지 않는 한 민주주의는 성공하지 못한다. 요즘 사람들은 무엇이 사실인지에조차 동의하지 않는데, 이건 사회 전체에 대한 도전이다. 단지 언론의 문제가 아니다.”
-현재 한국 정부ㆍ여당이 추진 중인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놓고 가짜 뉴스를 막을 수 있다는 찬성 의견과 표현의 자유가 훼손될 거라는 반대 의견이 충돌한다.
“한국 사정을 충분히 알지는 못한다. 하지만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를 정부가 결정하게 하는 건 위험하다. 정치인들, 특히 권력자들은 자기에게 이익이 되면 진실, 이익이 되지 않으면 거짓이라 판단할 것이다. 필연적이고 불가피하다.”
-한국의 경우 신문 독자 비중이 10년 전의 4분의 1 수준으로 줄었다. 전통 매체가 경쟁력을 강화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경영 측면에서는 유료화 구독, 콘텐츠 면에서는 탐사 보도나 전문성 제고 등이 해법으로 거론된다.
“한국 미디어 시장을 잘은 모르지만 인쇄 신문이 뉴스 사업과 언론인이라는 직업의 미래가 될 수 없다는 건 분명하다. 모든 미디어 조직은 진정한 의미에서 디지털화돼야 한다. 라디오, 텔레비전, 신문이 독자적인 매체인 것처럼 인터넷도 별개 매체다. 새로운 형태의 스토리텔링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 그건 더 구어적이고 오디오와 비디오, 애니메이션, 주석, 상호작용 그래픽 같은 도구들을 적극 활용하는 식일 수 있다. 광고는 더 이상 밥을 먹여 주지 않는다. 단가는 낮아지고 거대 기술 플랫폼들이 온라인 광고 대부분을 흡수하고 있다. 독자들은 자기가 읽고 싶은 것에 돈을 지불해야 하고, 우리는 그들에게 돈 낼 가치가 있는 것을 제공할 의무가 있다. 대표적인 게 탐사 보도다. 세 가지 이유다. 우선, 권력 기관과 힘센 자의 책임을 추궁하는 게 언론인의 핵심 임무다. 둘째, 그건 우리 말고 다른 사람들은 제공하기 어렵다. 셋째, 우리가 권력자들한테 책임을 지게 하기를 많은 독자가 바란다고 나는 믿는다.”
배런 전 국장이 편집국장으로 부임한 해 WP를 인수한 베이조스는 국장을 유임했고, 더 많은 자금을 지원했다. 배런 전 국장은 “기술이나 소비자 행동을 정교하게 이해하고 있던 베이조스는 성공적 전략과 투자, 참신한 발상들을 WP에 제공했다”며 “WP에 전기(轉機)가 마련된 건 그의 덕”이라고 평가했다.
-개인 투자라 해도 ‘아마존 노동조합’은 WP에 다루기 까다로운 이슈였을 것 같다.
“WP는 아마존이나 베이조스와 관련한 모든 이슈를 완전히 독립적으로 다루고 있다. WP 기자들과의 첫 만남 당시 베이조스는 WP가 아마존과 베이조스를 다른 회사ㆍ경영자와 똑같이 보도하라고 주문했다. 이후 WP 콘텐츠에 일절 간섭한 적이 없다. 기사를 제안하지도, 억압하지도, 비판하지도, 논평하지도 않았다. 아마존 노조 이슈도 예외가 아니었다. WP 기자들은 완전히 독립적으로 보도했다. 기사를 읽어보기만 해도 알 수 있다.” 실제 WP는 아마존 물류창고 직원 부상률이 다른 기업의 2배에 이른다는 장문의 비판 기사를 1일 내보냈다.
-WP가 아시아 커버를 위한 속보 거점으로 서울을 선택한 까닭은.
“WP의 목표는 더 완전한 24시간 뉴스 운영이다. 전 세계에 더 많은 스태프를 배치해야 했다. 적합한 곳을 찾고 있었는데, 서울은 지리적 위치, 안정성, 기반 시설(인프라), 비용, 언론의 자유 면에서 경쟁력이 있었다. 서울이라는 지역 자체가 상당한 뉴스거리라는 점도 고려했다.”
-WP 편집국장은 왜 그만뒀나.
“45년간 언론에 종사했고, 20년간 조직의 편집장이었다. 언론인은 아주 부담이 큰 직업이다. 특히 WP처럼 (유명한) 곳에서 사람들이 하루 24시간 즉각 뉴스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 인터넷 시대에 일하는 건 더 그렇다. 쉴 시간과 개인적 자유를 찾고 싶었다.”
-기자로 일하며 언제가 가장 큰 보람을 느낀 순간이었나. 후회한 일은 없나.
“2000년대 초 가톨릭 교회 탐사 보도의 보람이 가장 컸다. 그때 나는 보스턴글로브 편집장이었는데 수십 년간 은폐돼 온 성직자들의 성폭력을 우리 팀이 폭로했다. 당시 취재 보도 과정은 영화 ‘스포트라이트’에서 묘사되기도 했다. 하지만 보상은 영화가 아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마침내 들렸고, 권력 기관이 심각한 위법 행위를 해명하게 만들었다는 것, 또 우리 탐사 보도가 현재 모든 유형의 주요 기관에서 성폭력 혐의가 처리되는 방식에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이 바로 보상이다.”
-은퇴 뒤 계획은.
“WP에서의 8년간에 초점을 맞춘 책을 쓸 생각이다. 제목은 ‘권력의 충돌: 트럼프, 베이조스 그리고 워싱턴포스트’다. 내가 믿는 저널리즘 원칙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다른 기회들도 찾고 있다.”
-새 책 제목이 흥미롭다. 트럼프와 베이조스가 들어 있다.
“WP 편집국장 재임 때 벌어진 일들과 베이조스가 회사를 인수한 뒤 조직에서 일어난 변화들, 트럼프 전 대통령과의 갈등, 자유로운 언론의 역할과 관련한 쟁점들을 다룰 계획이다. 독립적인 저널리즘을 말살하고 객관적인 현실이라는 개념 자체를 훼손할 의도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몇 년간 기울인 노력도 다뤄진다.”
-언론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렇다. 당연하다. 많이 봐 왔다. 가톨릭 교회 탐사 보도뿐 아니다. 워싱턴포스트는 국가안보국(NSA)의 전례 없는 사찰을 폭로했다. 트럼프 행정부에 대한 폭로도 많이 했다. 1970년대 초에는 워터게이트 수사 결과를 공개해 당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사임하게 만들었다. 그래서다. 분명 저널리즘은 세상을 바꿀 수 있다.”
▦마틴 배런은
2013~2021년 8년간 워싱턴포스트(WP) 편집국을 이끌었다. 1976년 마이애미헤럴드에서 기자 경력을 시작해 로스앤젤레스타임스(LAT)와 뉴욕타임스(NYT)를 거쳤고, 2000년 마이애미헤럴드로 돌아와 처음 편집국장이 됐다. 이듬해 보스턴글로브 편집국장으로 자리를 옮기자마자 오랫동안 조직적으로 감춰져 온 천주교 사제의 아동 성추행 비리를 파헤쳤다. 퓰리처상을 받은 이 보도는 2016년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영화 ‘스포트라이트’로 만들어졌다. 자신이 책임진 뉴스룸에 17번의 퓰리처상을 안겼다. 1954년 플로리다주 탬파에서 태어났고, 펜실베이니아주 리하이대에서 언론학ㆍ경영학을 전공했다.
홍승주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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