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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부림이 났고 나는 몰랐다

입력
2021.06.02 04:30
수정
2021.06.02 05:45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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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낮에 사람이 칼에 찔리는 걸 봤다. 점심 먹고 회사로 가는 길이었다. 사회부 기자 시절 배운 대로 112에 신고했다. "노숙인이 사람 얼굴을 칼로 긋고 도망쳐요. 발생은 서울 시청역 9번 출구 앞 대로, 도주 방향은 호암아트홀, 현재 위치는 신한은행 서소문지점, 인상착의는…" 피해자가 피 흘리며 가해자를 쫓았다. 나는 피해자를 뒤쫓았다.

10분쯤 지나 경찰이 왔다. 격투 끝에 가해자가 붙잡혔다. 모여든 사람들이 피해자를 위로했다. "이제 괜찮아요. 구급차가 곧 온대요." "구급차 못 타요." "왜요?" "병원비가 없어요." "네?" "제 처지가 노숙인이나 마찬가지예요. 병원비도 밀려 있고…"

피해자는 노숙인 자활을 돕는 잡지 '빅이슈' 판매원이었다. '인간답게 살기 어려운 열악한 주거 환경에 속해 있는 것'이 자격 요건인 거리의 가난한 세일즈맨. 길게 찢긴 뺨이 허옇게 벌어졌는데도, 쏟아져 나온 피가 길바닥을 적시는 지경인데도, 그는 병원비부터 걱정했다. "병원에서 해결해 줄 거예요." "정말요?" 경찰이 설득해 구급차에 태우는 동안 그는 자기 발끝만 봤다.

"어떤 앎은 평생 쌓아온 세계를 한방에 무너뜨리며 온다"고 작가 홍은전은 칼럼집 '그냥, 사람'에 썼다. 그날이 그랬다. 기자가 되어 가난에 대해 이따금 썼지만, 하나도 모르는 채 쓴 거였다. 미납금, 쪽방, 반지하, 쉰밥, 곰팡이, 무연고, 연체 독촉… 그런 부스러기로 가난을 안다고 착각했다. 모르는 줄도 모르는 말들을 얼마나 용감하게 얹어왔는지.

며칠 뒤 남대문경찰서에서 들은 소식에 마음을 놓았다. "가해자는 구속됐고 피해자는 수술받고 무사히 퇴원했습니다. 강력 범죄 피해자 구조 제도에 따라 치료비를 정부가 지원할 겁니다." 모르는 곳까지 펼쳐진 사회안전망이 부지런히 작동하고 있어 다행이었다. "절반은 해피엔딩이군. 우리나라 만세."

이 글을 쓰기 위해 그를 전화로 다시 만났다. 그날 그는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고 했다. 수혈해야 했을 정도로 상처가 깊었다. 나의 모름도 깊었다. "그때 밀려 있었다는 병원비, 얼마였나요?" "8만 원이요. 작년에 응급실 갔다가 돈을 못 내고 나와서…"

40대인 그는 생의 남은 날들과 8만 원 사이에서 흔들린 거였다. 나의 세계는 또 한방을 맞았다. 겨우 한 겹 쌓았다고 생각한 앎은 비닐보다 얇았다. 그는 거리의 사람들이 무섭다고, 자꾸 죽고 싶어진다고 시름없이 말했다. 공격받은 가난에 해피엔딩이란 없는 거였다.

정치의 역할을 다시금 생각한다. 몰라서 아직 하지 못하고 있는 일에도 죄책감을 느끼는 것, 정치의 할 일이다. 모르는 것을 가리려고 기자들 앞에서 오뎅을 먹고, 겨우 아는 비좁은 세상에 갇혀 혐오 발언을 쏟아내는 것은 정치를 모독하는 일이다.

언론의 역할도 생각한다. 그날 사건은 짤막하게 보도됐다. 기사는 '생명엔 지장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에서 멈췄다. 생명에 지장이 없으면 대체로 무탈하게 이어지는 게 보통 사람들의 삶이니까. 그러나 언론은 모르는 이야기를 써야 한다.

정확한 신고를 한 공을 인정받아 경찰에서 범죄자 검거 보상금을 받게 됐다. 8만 원보다 많은 액수다. 그에게 전달하려 한다. 모르고 산 죄책감을 조금 덜기 위해서다. 연대는 모름이 끝나는 자리에서 출발한다.


최문선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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