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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상사가 아닌 범죄자를 신고합니다

입력
2021.06.01 19:00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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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랑
박미랑한남대 경찰학과 교수

편집자주

범죄는 왜 발생하는가. 그는 왜 범죄자가 되었을까. 범죄를 막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 곁에 존재하는 범죄의 세상 속으로 들어가 본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며칠 전 한 초임 변호사가 성폭력 미투를 했다. 그리고 후배 성폭행 혐의를 받은 로펌의 변호사는 사건이 기사화된 다음 날 사무실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가해자는 초임 변호사가 취직한 첫 직장의 대표변호사였다. 그는 고용 및 업무에 대한 결정권자였으며, 서울대 법대 출신으로 법조계의 두터운 인맥을 갖고 있는 업무상 위력을 충분히 행사할 수 있는 존재였다. 반복된 거부 의사에도 성폭력은 반복됐고, 피해 변호사는 향후 10년 뒤, 20년 뒤에 후회하기 싫어서 이 사건을 공개했다고 밝혔다.

이 사건, 피해자가 변호사라서 놀라운가? 사실 놀라울 것은 하나도 없다. 심지어 피해자의 담당 법률 대리인은 “피해 즉시 반응하거나 이를 문제 제기하는 데 있어 다른 사회보다 훨씬 어려운 곳이 법조계이고, 그게 이곳의 민낯”이라며 "피해를 입은 여성 변호사만의 한 사건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다른 조직은 다를 것인가? 아니다. 성폭력 피해에 대한 사건 조사가 시작되는 경찰도, 기소를 결정하는 검찰도, 유죄를 선고하는 법원 조직, 법을 가르치는 법학자들의 사회도 크게 다르지 않다. 범죄자를 처벌하고 범죄를 논하는 그들도 조직 내 성폭력 사건에는 둔감하며 침묵한다.

얼마 전 경찰 채용 면접시험에서 지원자에게 질문을 던졌다. “당신이 이토록 간절하게 원하는 이 조직에 합격했는데, 상사가 당신에게 강제추행을 한다면 당신은 경찰에 신고하겠는가?”라고 물었더니 대다수의 지원자들은 “제가 속한 그 조직은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라거나 “상사의 의도를 먼저 파악해보겠습니다”라고 응답했다. 그래서 재차 그런 희망적인 가정 말고 강제추행이 발생했다는 것이 명백한 사실일 때 경찰로서 경찰에 신고하겠느냐고 물었다. 안타깝게도 지원자들은 경찰에 신고하겠다는 답변을 당당하거나 명확하게 하지 못했다. 지원자의 성별과 상관없이 우리 조직은 그러하지 않을 것이라는 응답은 암기한 모범답안처럼 유사했다. 면접관으로서, 시민으로서 실망과 씁쓸함을 감추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 답변이 지원자들의 낮은 성인지 감수성 때문만이겠는가! 사실 지원자들을 탓할 수가 없다. 그들은 지원한 조직을 이해한 대로 응답했을 테고, 그렇다면 조직 문화가 근본적인 문제인 것이다. 조직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이 당한 성폭력 범죄를 침묵해야 하는 조직에서, 범죄자의 범의를 파악하겠다는 경찰이 어찌 일반 성폭력 피해자의 신고에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을까?

형사사법 분야에서 정의 사회를 실현하는 데 일조하고 싶다고 말하는 학생들에게 먼저 사회생활을 한 선배로서, 나 역시도 희롱과 폭력에 노출돼왔음을 털어놓는다. 법의 방향성을 논하고, 가해자를 처벌하는 데 관여하는 모든 형사사법 기관들도 그 민낯은 그렇게 당당하지 못하다.

정의로운 마음으로 경찰이 돼야겠다고 생각한 그들에게 조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우리 상사는 그러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하도록 만들지 마라. 이것은 “성(gender)” 갈등이 아니라, 범죄자와 정의의 싸움이다.

향후 형사사법 분야에서는 강제추행을 하는 직장 상사에 대한 신고 여부를 묻는 질문에 대해 “범죄자는 형사사법 분야에서 종사할 수 없습니다” “저는 조직 상사가 아닌 범죄자를 신고하겠습니다”라는 지원자의 말이 힘을 가질 수 있기를 기대한다.

박미랑 한남대 경찰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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