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지역 최초로 건립된 합덕성당과 공세리성당
한국 천주교에서 내포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 곳이다. 서해의 바닷물이 삽교천을 따라 내륙까지 깊숙이 흘러드는 충남 서북지역을 일컫는다. 이 물길을 따라 외국의 문물이 전해지고, 서학이라 불리는 천주교도 광범위하게 퍼졌다. 1748년 이존창에 의해 처음으로 전파된 이래 전국에서 가장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배출되고 거주하는 지역이었다. 예산의 여사울?배나드리성지, 당진의 신리?솔뫼성지, 서산의 해미성지, 홍성의 홍주성지 등은 박해의 상징으로 남았다.
충청 지역 최초의 성당도 이곳에 세워졌다. 1890년 삽교천을 사이에 두고 당진의 합덕성당과 아산의 공세리성당이 동시에 세워졌다. 1922년과 1929년에 각각 현재의 모습을 갖춘 공세리성당과 합덕성당은 초기 천주교회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어 일반인도 많이 찾는 관광지가 됐다.
합덕읍 남쪽 끄트머리 낮은 언덕에 자리한 합덕성당은 벽돌과 목재를 이용한 천주교회 특유의 중후한 멋이 돋보인다. 외벽은 붉은 벽돌로, 창 둘레와 2개 종탑의 모서리는 회색 벽돌로 쌓았다. 3개 출입구와 창이 모두 무지개 모양인 점, 바로 옆의 기와지붕 역사관도 이채롭다.
성당 뒷마당은 합덕제로 이어진다. 합덕제는 예당평야에 물을 대기 위한 저수지로 연꽃이 만발할 때 특히 아름다워서 합덕방죽 또는 합덕연지로도 불린다. 축조 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후백제 견훤이 왕건과의 전투를 위해 군마용으로 우물을 판 것이 시초라는 설이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면천 벽골지를 합덕지로 해석하면 제방을 처음 축조한 시기가 백제시대까지 거슬러 오른다. 전체 길이가 1,771m의 큰 저수지였지만 상당 부분 논으로 개관된 상태다.
현재 합덕제에는 여러 갈래의 산책로가 조성돼 있다. 제방 뒤쪽의 백련지를 비롯해 다양한 연꽃 연못과 호중도 등으로 구분된다. 아직 백련과 홍련은 잎만 무성한 상태지만 제방을 따라 버드나무가 운치 있게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고, 수련은 하나둘 꽃잎을 펼치고 있다. 아치형 터널에는 능소화와 인동덩굴을 심어 한여름 그윽한 꽃 향기를 선사할 예정이다. 곳곳에 나무 그늘이 있지만 제방길을 걸을 땐 햇살이 따갑다. 양산이 필수다.
공세리성당은 합덕성당에서 찻길로 약 30km 떨어진 아산 인주면에 있다. 당진에서 가려면 삽교천방조제를 가로지른다. 공세리성당은 옛 합덕성당의 전신인 양촌성당 관할하에 있다가 1895년 본당으로 승격됐다.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드비즈 신부가 10칸 정도의 기와집을 개조해 성당으로 꾸몄고, 1897년 일대를 매입해 성당과 사제관을 건립했다. 이후 신자 수가 지속적으로 증가하자 1922년 드비즈 신부가 직접 설계하고 중국인 기술자들을 동원해 현재의 고딕양식 성당을 완공했다. 봉긋한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성당은 앞마당의 커다란 팽나무를 비롯해 아름드리 나무에 둘러싸여 있어 짜임새나 경관은 합덕성당보다 우수하다. 성당을 한 바퀴 돌며 조성한 십자가의 길은 자체가 울창한 숲길이다.
‘공세리’라는 명칭은 조선시대 충청도 서남부의 조세를 보관하던 공세창(貢稅倉)이 있었던 데서 유래한다. 실제 성당 부지 전체가 조선 성종 9년(1478)부터 운영한 공세곶창이 있던 자리다. 중종 때는 창고 80칸을 건축하고 공주목과 홍주목, 청주목에 포함된 39개 군현의 세미를 보관했고, 이곳에 모아진 세곡은 수로를 이용해 한양까지 운반됐다. 현재 창고는 흔적을 찾을 수 없고, 성당 아래쪽에 일부 석축이 남아 있다.
공세곶은 삽교천과 안성천이 합류하는 지점이다. 당시 나루터였을 성당 뒤편에는 4차선 도로가 놓였고, 강변은 농지로 변해 물길과 멀어졌다. 그 너머로는 아산만방조제로 평택과 연결된다. 성당 자체만 놓고 보면 나무랄 데 없이 호젓하지만 아랫마을에 새 건물이 우후죽순 들어섰고, 도로 소음도 심한 편이어서 주변 환경은 점점 열악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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