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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의 세계'가 당신을 당신답게 만드나요?

입력
2021.05.29 04:30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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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남'과 '여'라는 시소 타기

편집자주

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과학을 읽습니다. 역사 에세이스트 박신영 작가는 '백마 탄 왕자' 이야기에서 장자상속제의 문제를 짚어보는 등 흔히 듣는 역사, 고전문학, 설화, 속담에 배어 있는 성차별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번갈아 글을 쓰는 하미나 작가는 과학사 전공자답게 2030 여성의 건강문제, 덜 눈에 띄는 여성의 산업재해 문제 등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해리성 정체감 환자의 90%는 여성이지만 미디어에서는 주로 남성으로 재현된다. 게다가 대부분은 폭력적인 모습을 띈다. 캐나다 과학철학자 이언 해킹은 "성별에 따라 우리는 거대한 시스템에 갇히며 (남성의 경우) 폭력적으로 (여성의 경우) 약해지도록 훈련받는다"고 지적한다. 사진은 해리성 정체감 환자가 등장하는 영화 파이트 클럽. 다음 영화

해리성 정체감 환자의 90%는 여성이지만 미디어에서는 주로 남성으로 재현된다. 게다가 대부분은 폭력적인 모습을 띈다. 캐나다 과학철학자 이언 해킹은 "성별에 따라 우리는 거대한 시스템에 갇히며 (남성의 경우) 폭력적으로 (여성의 경우) 약해지도록 훈련받는다"고 지적한다. 사진은 해리성 정체감 환자가 등장하는 영화 파이트 클럽. 다음 영화

친오빠와 가까운 편이다. 그와 대화는 팔 할이 농담이다. 지난주에는 차 타고 오래 이동할 일이 있었다. 영업왕인 그는 운전하는 동안 전화가 끊이질 알았고, 덕분에 나는 조수석에서 '형님어(語)'를 관찰할 기회를 얻었다. "어우 형님. 안녕하심까 형님. 잘 지내셨슴까 형님. 그름요. 예. 예. 예. 들어가십쇼~!"

전화를 끊고 나면 그는 갑자기 목소리 톤을 바꾸어 혀 짧은 소리를 냈다. “OO(본인 이름) 너무 귀여오. 완전 멋졌또.” 나는 역겨움에 치를 떨었다. 그런 행태가 반복되자 휴대폰으로 그 순간을 촬영하여 그의 직원들에게 이메일로 뿌리겠다고 협박했다. 그는 주도면밀하게 나에게만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연년생인 우리는 어려서부터 성격이 정반대였다. 오빠보다는 내가 더 차갑고 터프한 편이었다. 둘이서 할머니 댁이라도 가면 오빠는 밤마다 엄마가 보고 싶다며 울고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를 무서워했다. 그런 오빠가 신기했다. 나는 언니들이랑 자주 싸웠고 자존심을 부리다가 맞고 오기도 했지만 오빠는 동네 꼬마들과 노는 걸 좋아하며 사과가 빠른 사람이었다.

오빠가 달라진 건 군대를 다녀오고 나서, 직장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다. 그가 남성 호모소셜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재사회화되는 과정을 지켜봤다. 그동안 나도 변했다. 더 '여자다워'졌다. 지금의 우리는 얼마나 우리다울까?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같음과 다름, 평등의 딜레마

'공정', '정의', '평등'이란 단어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나? 대체로 동의한다. 문제는 평등에 도달하는 방법이 무엇인지가 사람마다 무척 다르다는 점이다. 출발선이 같으면 평등한가? 규칙이 같으면 평등한가? 결과가 같아야 평등한가? 이 모두가 중첩되고 교차하고 변화할 때는 어떻게 하나?

성 평등도 마찬가지다. 특히 몸에 관한 과학적 이론이 이를 뒷받침할 때는 더욱 헷갈린다. 여성이 남성과 같다고 주장해야 할까, 아니면 다르다고 주장해야 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질문은 둘 중 하나를 반드시 선택해야 한다는 점에서 이미 잘못됐다. 같다고 말하건 다르다고 말하건 둘 다 차별일 수 있다. 대신 더 섬세하게 물어야 한다. “여성이 남성과 다르다면 이 차이는 어떻게, 왜 만들어졌는가?”로 말이다.

같음과 다름 사이의 시소 타기. 이는 비단 여성뿐 아니라 인종, 성적 지향, 나이 등 모든 소수자 문제에서 부딪히는 일종의 딜레마다. 이러한 어려움 때문에 혹자는 페미니스트가 자기들이 입맛대로 상황에 따라 다르게 성차를 적용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평등을 이룬다는 것은 늘 그렇게 상황을 저울질하는 일이다.

입덧 완화제로 사용됐던 탈리도마이드 패키지. 위키피디아

입덧 완화제로 사용됐던 탈리도마이드 패키지. 위키피디아


탈리도마이드 쇼크, 여성을 배제하다

의학에서 평등을 이야기할 때 발생할 수 있는 아이러니를 소개하고자 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나치와 일본군에 의해 자행된 잔혹한 인체실험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인간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연구 대상자를 보호하는 윤리 원칙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1947년 수립된 '뉘른베르크 강령'과 1964년 '헬싱키 선언'이 대표적이다.

여기에 더해 1962년 '탈리도마이드 쇼크'가 터진다. 입덧 완화제로 사용된 탈리도마이드는 1957년부터 약 50개국에서 판매되었는데, 이를 복용한 전 세계 산모에게서 1만 명 이상의 기형아가 태어난 것이다(Janet Leigh, 'Thalidomide Drug Full Story', Life Magazine 1962-08-10). 탈리도마이드 사건을 계기로 의학 연구에서 임산부와 태아의 취약성이 대단히 강조됐다.

이외에도 1970년대 초 경구피임약 등 여성호르몬계열 약품의 치명적인 부작용이 속속 드러나면서 미국식품의약국(FDA)은 약물을 규제하는 권한을 확대하고 임산부, 혹은 가임여성을 임상시험에서 배제하는 규정을 만들어 이를 제도화했다. 그러면서 임상시험에 참여할 수 있는 피험자는 백인 성인 남성으로 한정되었다.

이전에는 여성이 연구 대상으로서 관심조차 받지 못해 임상시험에서 배제되었다면, 20세기 초중반을 거치면서는 여성이 (사실은 태아의) ‘보호’를 위해 연구에서 배제되기 시작한 것이다.

같은 질병이라도 남녀 체험이 다르다

이러한 현상에 본격적인 문제의식이 형성된 것은 1980년대 초반 페미니즘 제2물결과 함께 소비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소비자 보호 운동이 일면서다. 당시 70㎏ 백인 남성에게 맞춘 임상시험을 거친 의약품을 여성과 소수 인종, 어린이와 노인에게 끼워 맞추는 소위 '천편일률적인(one-size-fits-all)' 행태를 비판하는 움직임이 일었다.

미국 국립보건원(NIH)과 FDA는 각각 1990년, 1994년에 여성건강연구실을 설치하여 임상 연구에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를 반드시 참여하도록 강제하는 정책을 수립했다. 이를 통해 여성 건강에 대한 자료가 축적되면서 우울증, 치매, 골다공증 등 다양한 질병에서 성차가 있음을 밝히는 연구가 쏟아졌다.

미국 컬럼비아대 심장내과 의사 메리앤 리가토의 심장병 연구가 대표적이다. 그는 같은 질환이라 하더라도 여성과 남성의 질병 체험이 다르다고 지적하며 지금껏 심장병이 남성의 질환으로 여겨져 여성 환자에게 적절한 치료를 제공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여기서 더 나아가 리가토는 연구와 진료에 있어 남녀의 차이를 연구하는 의학을 새롭게 정의하고 이를 성인지의학(Gender Specific Medicine)이라 이름 붙였다. 한국에서도 2004년 11월 이화여대 의대에 성인지의학연구센터가 설립되며 성인지의학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현재는 활발히 활동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 심장내과 의사 메리앤 리가토는 같은 질환이라 하더라도 여성과 남성의 질병 경험이 다르다고 지적하며 남녀의 차이를 연구하는 성인지의학(Gender Specific Medicine)을 주창했다. 사진 출처는 메리앤 리가토의 성인지의학 홈페이지

미국 심장내과 의사 메리앤 리가토는 같은 질환이라 하더라도 여성과 남성의 질병 경험이 다르다고 지적하며 남녀의 차이를 연구하는 성인지의학(Gender Specific Medicine)을 주창했다. 사진 출처는 메리앤 리가토의 성인지의학 홈페이지


성차 연구가 꼭 좋기만 할까?

성인지의학은 기본적으로 여성이 생식기관뿐 아니라 신체의 모든 측면에서 남성과 다르며, 이것이 의학의 이론과 실천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전제한다. 곧 여성과 남성의 ‘다름’을 강조한다. 이는 기존 남성 중심 의학에서 여성의 몸을 재발견한다는 점에서 일견 긍정적으로 보인다. 실상은 좀 더 복잡하다.

첫째, 성차를 강조하는 연구는 성차를 발견했을 때만 주로 발표된다. 성차가 발견되지 않을 때는 연구가 발표되지 않고, 성차가 클 때 연구가 발표되니 실제보다 성차가 크다는 인식이 생길 수 있다. 둘째, 성차를 강조할수록 성별 고정관념에 부합하지 않는 사람이 소외된다. 곧 여성 내의 다양한 차이를 지울 수 있다. '여성의 몸은 남성보다 지방이 많다' 같은 전제는 여성 전체를 일반화함으로써 이에 해당하지 않는 여성을 배제한다.

셋째, 생물학적 성차를 강조하다 보면 건강 불평등을 잘못 이해할 수 있다. 흔히 다중인격으로 불리는 해리성 정체감 장애의 예를 들어보겠다. 자아가 하나로 통합되지 못하는 해리성 장애의 경우 미디어에서 재현되는 환자는 주로 남성이지만 사실 환자의 90%가 여성이다. 왜? 이번에도 여성호르몬 때문인가?

해리성 정체감 환자의 90%는 여성이지만 미디어에서는 주로 남성으로 재현된다. 게다가 대부분은 폭력적인 모습을 띈다. 캐나다 과학철학자 이언 해킹은 "성별에 따라 우리는 거대한 시스템에 갇히며 (남성의 경우) 폭력적으로 (여성의 경우) 약해지도록 훈련받는다"고 지적한다. 사진은 해리성 정체감 환자가 등장하는 영화 인크레더블 헐크. 다음 영화

해리성 정체감 환자의 90%는 여성이지만 미디어에서는 주로 남성으로 재현된다. 게다가 대부분은 폭력적인 모습을 띈다. 캐나다 과학철학자 이언 해킹은 "성별에 따라 우리는 거대한 시스템에 갇히며 (남성의 경우) 폭력적으로 (여성의 경우) 약해지도록 훈련받는다"고 지적한다. 사진은 해리성 정체감 환자가 등장하는 영화 인크레더블 헐크. 다음 영화


같은 병이라도 남성은 감옥에

해리성 장애 환자의 많은 수가 아동기 학대를 경험한다. 아동기 학대를 겪는 것이 여성만은 아닐 것이다. 캐나다 과학철학자 이언 해킹은 그의 책 '영혼을 다시 쓰기(Rewriting the Soul)'에서 말한다. “다중인격 남성 대부분은 병원보다는 감옥에 있다. 성별에 따라 우리는 거대한 시스템에 갇히며 (남성의 경우) 폭력적으로 (여성의 경우) 약해지도록 훈련받는다. 그게 우리에게 기대되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여성의 우울과 질병이 에스트로겐의 문제가 아니듯 남성의 폭력도 테스토스테론의 문제가 아니다. 분노와 폭력을 권장하는 세계에 노출되며 남성은 차근차근 둔감해지고 '남성다움'을 권력으로 휘두르는 법을 익혀간다. 여성이 얼마나 주변화되어 왔는지를 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반대로 남성 중심성이 얼마나 허구적인지, 또한 그 속에서 불화하며 미끄러지는 남성이 실제로 얼마나 많은지를 말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려면 당사자의 증언이 필요하다. 남성 호모 소셜 사회가 당신을 어떻게 망가뜨리는지를 이야기해주시라. 형님의 세계가 당신을 당신답게 살게 하였는가? 그걸 말하는 건 수치가 아니다. 나는 남자들이 통제와 권력을 잃을 때 오는 편안함을 만끽하길 바란다.

하미나 작가

하미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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